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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활자의 나라] 한글활자, 민간에서 사용한 금속활자

1. 갑인자, 조선 대표활자, 2. 실록자와 정리자3. 한글활자4. 목활자5. 활자장.

한글활자,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 세종은 수양대군 등에게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책을 인쇄하기 위해 한글활자를 만들었다. 당시 인쇄된 책 등으로 볼 때 한글활자는 동활자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조때 한글로 번역한 불경들이 많이 출판되면서 여러 활자들이 만들어졌으며, 그중 강희안이 만든 을해자가 많이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목활자를 사용하다가 현종때 4번째 갑인자인 무신자와 함께 한글 금속활자는 만드는 등 구한말까지 지속적으로 한글 활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한글은 일반백성뿐 아니라 왕세자나 사대부 가문의 아동들을 위한 유교서적 언해본을 편찬하기 위해 꽤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글 금속활자와 목활자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 세조때 만들어진 을해자 30점도 포함되어 있다.

왕세자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한글로 활자를 만들다.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자이므로 조선시대 활자도 대부분 한자활자입니다. 그러나 왕세자 교육이나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한 유교서적 언해본(諺解本) 간행 등을 위해 한글 활자를 만들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한글 금속활자 750여 자와 한글 목활자가 상당수 남아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금속활자 30여 자는 1461년(세조7)에 간행한 『능엄경언해』에 사용된 활자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활자입니다. 나머지 금속활자와 목활자들은 17~19세기 국가에서 간행한 다양한 언해본에 사용된 것입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한글 금속활자로 간행한 『능엄경언해』, 楞嚴慶諺解, 조선 1461년(세조7).

강희안이 고한안 을해자를 사용해 편찬한 불경으로 한글활자의 제작연대를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조선초기 한글활자.

불교 경전 『능엄경』을 한글로 풀이한 책으로 한자로 된 본문은 강희안(1419~1464년)의 글씨체로 만든 을해자(乙亥字)로 인쇄했습니다. 함께 쓰인 한글 활자는 현존하는 제작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활자입니다. 글자체와 활자 모양이 조선 후기의 것과 다릅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한글 금속활자, 조선 15,17~18세기

 

한글 금속활자로 간행한 『시경언해』, 詩經諺解, 조선 17세기.

사대부계층에서 아동교육을 위해 한글로 풀이한 유교서적들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다. 한글의 편리성때문에 얻을 수 있는 학습효과를 양반사회에서도 물리치기는 힘들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교 경전 『시경詩經』을 한글로 풀이한 책으로 한자로 된 본문은 무신자(네번째 주조한 갑인자)로 인쇄했습니다. 함께 사용한 한글 활자는 17~18세기 갑인자체 활자로 간행한 언해본에 쓰인 활자들입니다. 세자궁을 뜻하는 춘궁(春宮) 도장이 찍혀 있어 왕세자 교육을 위해 간행한 책에 한글 금속활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한글 목활자로 간행한 정조의 윤음, 조선 17~19세기

 

한글목활자, 조선 17~19세기

원춘도(原春道, 지금의 강원도)에 흉년이 들자 해당 지역 백성의 세금을 감해준다는 정조의 윤음(綸音, 왕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입니다. 정조가 내린 윤음은 대부분 임진자(壬辰字, 다섯번째 주조한 갑인자)로 간행했으며, 한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한글 번역문을 뒤에 붙였습니다. 한글 금속활자도 일부 사용하고 부족한 글자는 목활자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오륜행실자로 간행한 『오른행실도』, 오륜행실도, 조선 17~19세기

 

오륜행실자 한글목활자, 조선 17~19세기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본문을 정리자(整理字)로 간행했으며, 백성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판을 먼저 싣고 한문과 한글로 내용을 수록했습니다. 정조는 이 한글 번역을 넣기 위해 오륜행실자(五倫行實字)를 맏를도록 했습니다. 정리자와 크기 및 형태가 유사하며 글자체는 단정한 한글 해서체(楷書體)입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한구자(韓構字)는 숙종때 김석주가 당대 명필이었던 한구에게 글자본을 쓰게 하여 만든 활자이다. 주조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숙종때 만히 사용되었다. 글자는 작은 필서체이며 정부에서 사들여 책의 인쇄에 사용되었으며, 정조 때 다시 주조하였으며 이를 “재주한구자” 또는 ‘임인자’라고 부른다. 전사자(全史字)는 19세기초 순조때 박종경이 주조한 동활자로 약 20만자가 있었다고 하며, 집안의 문집과 족보, 당대 명사들의 문집을 간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외에 왕실족보를 만들기 위해 민간에서 구입한 값싼 철로 만든 철활자 등이  있다.

금속활자, 사용층이 늘어나다
조선 전기에는 금속활자가 국가의 전유물이었지만, 17세기 이후 민간에서도 금속활자를 만들고 사용했습니다. 김석주(1634~1684년)거 며일 한구의 글씨체로 한구자(韓構字)를 만들었고, 17~18세기에는 명나라 판본에 사용된 인서체(印書體, 붓으로 쓴 듯한 글자체와 구분되는 각진 글자체)를 본떠 교서관(校書館)에서 만든 활자로 만든 개인의 문집을 만드는 일이 유행했습니다. 1816년(순조16) 순조의 외삼촌 박종경(1765~1817년)은 청나라 판본의 글자체를 본떠 전사자(全史字)를 만들었습니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 상업적 출판을 목적으로 철활자를 만들었고 이 활자로 조선 왕실의 족보를 찍었습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한구자로 간행한 『규화명선』, 奎華名選, 조선 1792년(정조16)

 

한구자,  韓構字, 조선 18~19세기

정조가 선발하여 규장각에서 교육한 문신들이 지은 문장 가운데 뛰어난 것을 골라 편찬한 책입니다. 정조는 문집 등을 간행하기 위해 작은 활자가 필요하다고 여겨 1792년 한구(1636~?)의 글씨체로 한구자 8만3천 여자를 다시 주조했습니다. 이 활자는 문집류 간행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1857년(철종8) 주자소 화재 후 3만여 자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한구자韓構字, 교서관인서체자校書館印書體字, 전사자全史字

 

교서관인서체자로 간행한 『우암선생문집』, 校書館印書體字.尤菴先生文集, 조선 17~19세기.조선 1717년(숙종43)

숙종의 명으로 간행한 조선 주자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의 문집입니다. 교서관인서체자는 17세기 후반 처음 주조된 후 여러 차례 보충하여 주조되었는데, 글씨체에 따라 크게 전기와 후기로 구분합니다. 왕명으로 통치에 필요한 책들을 간행했으며 조선말 학부의 교과서 간행에도 사용했습니다. 사대부가에서 문집 간행에도 널리 사용했습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전사자로 간행한 『화음계몽언해』, 華音啓蒙諺解, 조선 1883년(고종20)

 

전사자, 全史字, 조선 1814년(순조14),

역관(譯官) 이흥헌(1838~?)이 지은 중국어 회화 교재로 중국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고 구절 단위로 한글 번역을 넣었습니다. 전사자는 중국의 전사(全史, 전체 역사)를 간행한 판본의 글자체와 비슷합니다. 전사자를 만든 박종경 자식과 집안의 문집과 족보, 당대 여러 명사들의 문집과 저술 간행에 사용되었습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철활자로 간행한 『선원속보』, 선원속보(璿源續譜, 조선 19세기

 

철활자, 조선 19세기

철활자로 인쇄한 조선 왕실의 족보입니다. 철활자는 19세기 초 족보와 문집 등을 상업적으로 간행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민간에서 비싼 구리 대신 철로 만들었으며, 제작 솜씨도 떨어집니다. 이 철활자는 종정원(宗正院, 왕실의 계보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에서 족보 편찬을 위해 사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처: 중앙박물관>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