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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목탑을 모방해서 만든 백제 석탑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국보)이다. 일부가 무너져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로 보강하여 반쪽만 남아 있던 것으로 2000년대 이후 해체.수리가 진행중이다. 해체되기 이전에 6층까지 남아 있었는데 높이 14.24 m로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또한 미륵사가 창건되었던 7세기 백제 무왕 때 이 석탑도 같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기도 하다.

목탑을 충실하게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목탑과 마찬가지로 낮은 1단으로 되어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을 높게 만들었다. 1층 몸돌은 목조건축물처럼 각면을 3칸으로 나누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만들었다. 2층부터는 탑신을 낮게 만들었으며 각 부분의 표현도 간략화되었다.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심초석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서탑(2019년 복원 후)>

<2009년 해체.수리 과정 중에 있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가운데 사리엄장구가 발견된 심초석이 놓여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때 이곳에 있던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 신라 황룡사에 버금가는 최대 규모의 사찰로 3탑, 3금당식의 독특한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앞쪽에 목탑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석탑이 세워져 있고, 뒷편에도 3개의 금당터가 남아 있다. 금당 뒷편에는 강당이 있고, 그 뒷편으론 3개의 승방이 자리하고 있다. 승방의 규모로 볼때에도 상당한 인원들이 이 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까지 조금씩 축소되어오다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익산 미륵사지(사적)>

백제 무왕이 세웠던 당시 최대 규모이 사찰로 3탑, 3금당식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미륵사지 서탑(국보)는 해체.복원하였으며, 동탑이 있던 건물터에는 옛 석탑을 복원해 놓고 있다.


<2001년 해체 전 미륵사지 석탑>

앞면만 남아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로 보강하여 석탑 구조물을 지지하고 있다.(사진출처: 문화재청, 2017년)

<2006년 해체과정 중인 모습>

이 당시에는 심초석에서 사리엄장구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석탑 중앙부에 위치한 사리엄장구 출토지>

<석탑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동물형태의 조각상>

<기단부>

기단은 목탑처럼 1단으로 낮게 만들어졌으며, 1층 몸돌에 있는 출입문과 연결되는 계단이 있다.

<해체 후 현장에 정리해 놓은 석탑 부재들>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본디 방형 평면인 이 석탑은 동북쪽 부분이 6층까지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뿐 무너진 부분을 일제시대인 1915년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2001년까지 6층이 남아 있었으며 높이가 12.24m 였다. 탑의 건립 연대는 백제 무왕(A.D. 600~ 641년)으로 추정되며,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시원양식(始原樣式)의 석탑이다. 이 탑은 시원양식의 석탑이라는점뿐만 아니라 규모도 고대 한국 석탑 중 가장 큰 석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석탑이다. 2층 기단의 안쪽에 서 있는 초층 탑신(初層塔身)은 4면이 각 3칸이며 각면 중간에 문이 있어 탑신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으며 탑 내부 중심에는 거대한 네모난 돌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목조건물처럼 창방(昌枋), 평방(平枋)이 있고 그 위에 두공(枓供) 형식의 받침돌이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2층 이상은 탑신의 높이가 낮아지면서 내부 공간도 없어지고 각 부재(部材)의 구조도 간결하게 생략되며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와 높이가 차례로 줄어들었다. 각층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두께가 얇고 평평한데 귀부분을 위로 치켜올려 반전을 이루며 옥개받침은 3단이다. 동쪽에 이와 같은 석탑이 또 하나 있었으며, 두 석탑 사이에는 목탑(木塔)이 있어 미륵사에는 원래 3개의 탑이 있었다. 이 탑은 붕괴 위험이 있어 2001년부터 해체 보수정비 중에 있다. (출처: 문화재청)

<미륵사지 동탑 건물터에서 재현한 구층석탑>

1992년에 복원된 것으로, 남아 있던 서탑의 형태를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목탑의 외형과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면서 세부적으로 간략화된 구성요소들을 살펴볼 수 있다. 옛 석탑의 형태를 이해하기는 좋으나 바람직한 복원의 방향은 아닌듯 하다.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하여 그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유물을 조사한 결과, 서탑(국보11호)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원 구층 석탑은 동원 탑지에서 출토된 기단석, 옥개석,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재 남아 있는 서탑 등을 통해 고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료했다. 복원된 탑은 하층기단이 1변 12.5m, 상층 기단이 10.5m인 2층 기단이다. 탑 높이는 짐녀에서 상륜부까지 총 27.8m이다. 탑에 달린 풍탁은 동원 탑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탑 복원에는 기존 탑 부재와 같은 재질인 익산 황동에서 캐낸 화강암 2,000여 개와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2개를 포함, 2,700여 톤이 사용되었다. 석탑 복원 기록과 사리장엄은 5층 심주석에 봉안하였다. (출처: 문화재청)

<기단부>

목탑처럼 탑신 1층 몸돌을 기둥을 이용해  3칸으로 나누었으며, 가운데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기단부는 1단으로 낮게 만들었다.

미륵사지 사리구.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복원 작업 도중 탑의 심초석 사리공에서 사리호(舍利壺)를 포함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었습니다. 사리호는 외호와 내호, 사리병의 삼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연꽃무늬와 넝쿨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금동제 외호는 왕흥사의 은제 사리병과 닮아 백제 사리기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금제 내호는 외호와 유사하지만 크기가 작고, 뚜껑과 항아리가 붙은 일체형입니다. 내호 안에 있던 사리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리로 만든 사리기이지만, 발견 당시 뚜껑을 제외하고는 형태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었습니다. 사리공 안에서는 구슬, 장신구, 청동합과 같은 다양한 사리공양구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금제 사리봉영기, 639년, 익산 미륵사지>

2009년 발견된 것으로 미륵사지 석탑 창건 내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이었던 사택(沙澤)씨 출신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사리봉영기는 금판의 앞뒷면에 도자(刀子)를 이용하여 음각하고, 각 획을 따라 주사(朱唦)를 입혀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전체 193자로 앞쪽에는 99자, 뒤쪽에는 94자를 새겼습니다. 좌평(佐平) 사택덕적(沙澤德積)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을 정확히 밝힌 것입니다. 미륵사 서탑 창건의 주체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임이 밝혀져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설화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삼원식(三院式)인 미륵사의 창건에 선화공주를 포함한 서로 다른 발원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금동제 사리외호.금제 사리내호, 639년, 익산 미륵사지>

<금동제 사리 외호 출토품, 639년, 익산 미륵사지>

<금제 사리 내호 출토품, 39년, 익산 미륵사지>

<3. 금제족집게, 639년, 익산 미륵사지>

<4. 금귀걸이와 금덩어리, 639년, 익산 미륵사지>

<5. 금판, 639년, 익산 미륵사지>

사리공에서는 모두 18개의 금판이 확인되었는데 그 가운데 3개의 금판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중 하나에는 “중부의 덕솔 지애가 금 1량을 시주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리봉영기와 달리 아마도 사리를 봉안할 당시 급하게 쓴 글씨로 추정됩니다. 글자의 내용은 백제의 행정구역(中部), 관등(德率, 16품 관등 중 4품), 도량형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를 주고 있습니다. 1량(兩)의 무게는 13.2g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유리판, 琉璃板,639년, 익산 미륵사지>

사리공 바닥에 깔았던 유리판입니다. 사리공 바닥의 너비에 정확히 맞도록 처음부터 제작된 특수 유리판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유리구슬, 639년, 익산 미륵사지>

진단구, 미륵사지 석탑 사리용기가 안치된 심주(心柱)로 가는 통로의 바닥석 아래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사찰 건물의 기단 등에 나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진압하기 위하여 기단 하부 축조 시에 각종 물건을 공양하는 진단구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소조 나발과 은제 손톱장식은 중국 남조 장간사(長干寺) 탑 사리 공양 중에 탑 아래에 매납했다는 불조발(佛爪髮), 즉 부처의 손톱과 머리카락 봉안 의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3. 소조 나발, 4. 은제 손톱장식, 639년, 익산 미륵사지>

<5. 은제관꾸미개, 639년, 익산 미륵사지>

<6. 은덩어리, 7. 은제 허리따꾸미가, 639년, 익산 미륵사지>

<8 도자(복제품), 639년, 익산 미륵사지>

<1. 청동합>

<3. 금구슬, 4. 금판, 5. 금못,  6. 굽은옥, 7. 호박구슬, 8. 마노구슬, 9.유리구슬, 10. 진주구슬>

<2. ‘상부달솔목근上卩達率目近’ 글자를 새긴 청동합>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