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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유적 전시관] 사찰로의 변화.

왕궁리유적지는 오층석탑(국보)의 존재로 사찰이 있었던 절터로 알려져 있었다. 이곳이 언제 사찰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무왕이 죽은뒤 그를 기리는 원찰로 성격이 바뀐것으로 보고 있다. 왕궁 중심부에 있던 중요 건물을 설치하고 목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의 1탑 1금당식 사찰이 조성되었다. 통일신라 때 사찰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찰과 관련된 유 물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사찰이름 등이 적힌 기와, 통일신라 양식을 하고 있는 기와와 토기류 등이 있다. 전시관에는 인근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같이 전시되어 있다.

유적지 입구에는 백제 무왕이 궁성을 조성했을 때부터 사찰로 변한 이후까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유적 전시관이 있다. 왕궁터 전체의 모습과 당시의 생활상의 모습 등을 재현해 놓고 있으며, 기와 등 건축 부재를 중심으로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백제 왕궁터가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에 백제 궁성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되고 있다.

<익산왕궁리 유적지 사찰 영역>

백제 말 궁성 중심에 있던 건물을 허물고 사찰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궁성 정문을 기준으로 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1탑 1금당식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사찰로의 변화
백제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시기와 계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백제말기를 전후하여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그 위에 다시 사찰을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은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식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이 중심선이 남측 궁의 당장에 연결된 중문의 중심선과 같은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석탑의 하부에서는 목탑의 기초부인 판축층이 확인되었고 이 판축층 아래에서 또 다른 건물지의 흔적이 보이고 있어서 백제 왕궁과 관련된 건물지일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금당지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앙에는 초석이 없는 통칸으로 기단은 미륵사지 금당지 기단과 유사한 2중기단으로 보이지만 기단석 초석은 대부분 유실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강당지도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기단석재와 초석이 대부분 제거된 상태이며, 강당지 아래에는 유리와 동의 제련과 같은 공방지 흔적이 조사되었다. 왕궁리유적 내 사찰의 건립연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사찰명기와, 막새기와, 평기와, 토기류 등으로 보면 중심연대는 통일신라로 추정된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왕궁사’가 새겨진 기와,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 유적>

<글자가 새겨진 기와,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유적지>

<‘대관관사’가 새겨진 기와,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 유적>

명문기와
사찰유적과 관련된 통일신라기의 명문기와는 지명, 사찰명,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명문 등이 있다. 지명이 있는 기와는 금마저 1종류이며, 사찰 이름이 표시된 기와는 대관관사, 관궁사, 왕궁사 등 3종류이고 정역, 천무대작국, 풍도사전 등과 같이 확실한 의미파악이 어려운 것 등이다. 사찰 이름이 표시된 기와는 이름을 넣는 방법, 글자의 방향, 명문과 다른 문양과의 결합여부 등에 의해 9종류로 세분된다. 명문을 넣는 방법은 대관관사, 관궁사는 고판을 만들어 찍었으며, 왕궁사명 기와는 기와가 마르기 전에 날카로운 도구로 직접 써 넣었다. 명문의 형태은 양각과 음각이 있으며 글자의 방향은 정서와 좌서가 있고 다른 문양과의 연결은 격자문, 이골문, 이골문+격자문의 복합문 등이 있다. (왕궁리유적지 전시관, 2017년)

<수막새.암막새,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 유적>

<연꽃무늬 수막새,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 유적>

사찰관련 막새기와
왕궁리유적 내 사찰의 중심 연대가 통일신라이기 때문에 사찰관련 막새기와는 대부분 통일신라기의 수막새와 암막새이다. 통일신라기의 막새기와는 백제시대 막새기와에 비해 바탕흙에 사립이 많이 포함되어 거칠고 복판 또는 중판의 연화문 수막새가 주를 이루며, 백제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암막새에 당초문 또는 괴운문이 나타난다. 수막새의 무늬는 국화문과 유사하게 가늘고 긴 연꽃문으로 변화하고 주변부에 연자가 나타나며, 가방부는 후기로 가면서 연자가 없고 괴운문과 같이 하나의 돌기 형태로 변화한다. 암막새 기와의 무늬는 주로 당초문, 인동당초문, 괴운문 등이고 주인부에 연자가 나타난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토기병,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 유적>

<토기항아리,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 유적>

<토기뚜껑, 완, 통일신라,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제석사지(사적)>

백제 무왕이 왕궁리 궁성을 수호하는 의미로 제석천을 모시기 위해 세웠던 사찰이다.

익산 제석사지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동쪽으로 약 1.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백제 익산왕궁의 왕실사찰로 알려진 절터이다.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로 목탑-금당-강당이 남북중심축 선상에 있다. 그리고 중문, 동서회랑, 승방이 확인되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동서회랑의 거리가 약 100 m이고, 중문에서 강당까지가 140 m로 미륵사지 다음으로 크다. 또한 백제 말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인동덩굴무늬암막새가 출토되어 백제 암막새의 최초 형식을 보여준다. (왕궁리유적 전시관, 2017년)

<도장찍은 기와, 백제, 익산 제석사지>

<인동덩굴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백제, 제석사지>

<흙으로 만든 벽돌과 벽체, 백제, 익산 제석사 폐기장>

제석사 폐기 유적
제석사 폐기유적은 제석사지에서 북쪽으로 500여 m 거리에 위치한다. 발굴조사 전에는 백제 기와 가마터로 추정되었으나 2003년과 2004년 원광대학교 박물관의 시굴조사 과정에서 「관세음웅험기」에 기록된 정관 13년(639) 화재 이후 잔해를 폐기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제석사 폐기 유적에서는 제석사지와는 다른 연화문 수막새가 출토되었으며, 암막새나 인장와는 수습되지 않아 유물에 있어서 제석사지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완형의 벽돌과 표면에 백회까지 칠한 벽체편, 벽화편 등이 수습되었고 포벽의 빈 공간을 메웠던 고막이 형태의 포 벽체와 소로, 첨차 등의 사이를 메운 벽체 편 등이 출토되어 지금까지 백제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백제 건물의 포벽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소조불상, 보살상, 천부상, 신장상, 악귀상, 동물상 등이 출토됨에 따라 연구 성과에 따라서는 백제 유적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찰 내부를 장엄했던 불상의 모습과 함께 소조불상의 제작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익산 왕궁리 유물전시관, 2017년)

<벽화조각, 백제, 익산 제석사 폐기장>

<손,백제, 익산 제석사 폐기장>

<몸통,백제, 익산 제석사 폐기장>

<악귀의 몸, 백제, 익산 제석사 폐기장>

<‘명지이?’를 새긴 기와, 백제, 익산 제석사 폐기장>

<연꽃무늬 수막새, 백제, 익산 제석사 폐기장>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왕궁리 유적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