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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세계유산 백제] 백제의 건축

1. 도성과 행정2. 건축3. 무기와 전쟁4. 일상생활5. 사찰과 불교문화6. 능묘7.국제교류, 8. 지방통치

백제는 웅진기때부터 중국 남조의 남조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으며, 건축분야에서도 중국의 영향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백제의 건축의 흔적은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와 익산에 남아 있는 궁궐 건물터, 도성 안팎의 여러 절터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미륵사지 석탑은 당시 목조건축물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백제의 건축기술은 신라 황룡사 건축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 나라의 동대사를 비롯한 주요 사철 건물 등에서 옛 백제 건축물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백제 유적지에서 출토되고 있는 기와는 당시의 건축 기술과 문화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웅진기 백제는 중국 남조의 기와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이전과는 다른 기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사비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는 도성 안팎에 많은 사찰이 세워짐에 따라 기와제작도 활발해졌으며 양식도 다양해졌다.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은 신라와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기와제삭 전문가인 와박사가 일본에 파견되어 당시 일본의 기와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대왕부왕’글자를 찍은 수막새, 6세기, 부여 구아리>

8엽의 연꽃 중 4개에 각각 한 글자씩 ‘대왕부왕’이 확인됩니다. 기와틀 자체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 다량 생산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과 관련된 건축물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연꽃무늬 수막새, 1. 5세기 후반 ~ 6세기, 공주 공산성, 2. 5세기 후반~6세기, 공주 공산성.>

웅진기 백제 기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제작수법과 표현이 투박하다.

공산성 추정왕궁지에서 출토된 연꽃무늬 수막새는 부여 지역 수막새에 비해 지름이 크고 연꽃잎의 끝이 둥글며, 자방이 큰 특징이 있습니다. 웅진기 중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연꽃무늬 수막새, 3. 6~7세기, 부여 관북리, 4. 6~7세기, 익산 왕궁리>

사비기 백제 기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웅진기에 비해 표현이 섬세하며 세려된 모습을 보인다. 웅진기 기와와 같은 문양을 사용하고 있다.

<연꽃무늬 수막새, 5. 6~7세기, 부여 관북리, 6. 6~7세기, 익산 왕궁리>

<연꽃무늬 수막새, 7.8. 6~7세기, 부여 관북리, 9. 6~7세기 익산 왕궁리>

사비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연꽃무늬 수막새가 제작.사용됩니다. 그러나 관북리 유적과 왕궁리 유적 등 왕릉 구역에서는 하트형 연판의 수막새가 주로 제작되어 7세기까지 거의 같은 무늬와 제작 기술이 지속됩니다. 전각의 신축과 증.개축에 지속적인 통제나 관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바람개비무늬 수막새, 1. 7세기 공주 공산성, 2. 7세기, 익산 왕궁리, 3. 7세기, 부여 부소산성>

바람개비무늬 수막새는 7세기 이후 백제에서 성행하였습니다. 공산성 출토품은 사비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산성에 대한 수리와 관리가 있었음을 짐작케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연꽃무늬 벽돌, 1. 6세기, 부여 정동리 가마터, 2. 6세기, 부여 청산성,>

무령왕릉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모양의 연꽃무늬 벽돌입니다. 정동리 가마터는 벽돌의 제작지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청산성(북라성) 출토품은 사비도성 안에서 최초로 확인된 연꽃무늬 벽돌로서, 나성이 538년의 사비 천도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글자를 새긴 돌, 6세기, 부여 나성>

글자는 총2열 7행 14자이지만, 판독가능한 글자는 ‘ㅁㅁㅁㅁㅁ立此(입차)’, ㅁㅁㅁ上(상)ㅁㅁㅁ(착)’뿐입니다. ‘입차’는 ‘이 ㅁ을 세우고’, ‘상’은 ‘~위에’ 또는 사비도서어 내 5부와 결부해 볼 수 있습니다. 인력동원과 관련된 내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내문, 세계유산 백제, 2016년)

건축
백제는 왕궁이나 관청, 사찰 같은 중요한 건물을 지을 때는 기와를 사용했습니다. 사비로 수도를 옮긴 538년을 전후해 도성 안팎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고, 많은 사찰을 지으면서 기와제작도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기와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장인인 와박사(瓦博士)가 있었으며, 왜에 파견해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사비 도읍기에는 왕궁의 신축과 증.개축에 사용할 기와 제작 도구와 문양 등을 통제하면서 관리했지만, 사찰을 지을 때 사용한 기와는 사찰에 따라 다양하고 특징적인 문양들을 새롭게 만들어 제작했습니다. 이는 사비 도읍기에 기와를 사용하는데 일정한 규칙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왕궁과 사찰의 기와는 문양, 제작방법, 수급체계가 달랐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토관, 6세기, 부여 용정리 출토.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 시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토관, 6세기, 부여 용정리, 관북리 출토>

사비도성에서는 도수관의 용도로 사용된 토제품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기와를 전용해 쓰기도 하고, 처음부터 토관으로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사례도 많습니다. 틀에서 분리한 원통모양의 수키와를 절반으로 가르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거나, 일반적인 수키와에 비해 일부러 길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소상’ 글자를 새긴 토기, 6세기, 부여 관북리>

관북리 유적의 철기제작소로 추정되는 곳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입니다. 토관용 수키와를 연결하여 흘러온 물이 토기 안에 고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위쪽에는 뚜껑을 덮거나 연결할 수 있도록 턱 부분이 있으나, 출토 당시에는 거꾸로 바닥에 묻어둔 상태였습니다. ‘소상(小上)’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는데, ‘작은 구멍이 위쪽’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가래, 6세기, 부여 군수리>

가래는 삽처럼 생긴 가랫날에 양 귀퉁이를 새끼끈으로 묶어 양쪽에서 잡아당기고 나머지 한 사람은 가래 손잡이를 붙들고 힘과 방향을 조절하면서 사용합니다. 흙을 멀리 던져 보낼 수 있고, 힘이 적게 들기 때문에 논농사 이외에도 보를 쌓는 일, 무덤을 파는 일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군수리 출토 가래는 수로에서 출토된 것으로 다른 유적의 것보다 날과 자루가 큰 편입니다. 아마도 수로나 우물의 진흙을 갈아 엎거나 옮길 때 사용했을 것입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수도시설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는 길이 40 m에 이르는 기와를 조립하여 만든 도수관이 확인되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지표수를 모아 정화시켜 용수로 사용하기 위한 목곽 수조와 연결되어 있어 당시 체계적인 도수시설이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여 시가지에서는 폭 10 m가 넘는 남북 도로와 동서 도로가 확인되었는데, 이 도로 좌우에는 하수구 시설이 있었습니다. 하수구는 도랑을 파고 양 벽면에 두꺼운 판자를 댄 구조입니다. 웅진도성에도 이와같이 물이 잘 빠지도록 도로 옆에 배수로를 설치했습니다. 이러한 시설은 백제의 발달된 도시계획의 일면을 잘 보여줍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
  2. 중앙박물관
  3. 문화재청
  4. 두산백과
  5. 위키백과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