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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지(사적), 백제 왕실이 부소산성 맞은편에 세운 사찰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왕흥사지(사적) 절터이다. 부여 부소산성 맞은편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의 옛 절터이다. 왕흥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사찰의 가람배치가 확인되었으며 기와편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가람배치는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형태로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목탑터 심초석 부근에서 금제사리병, 은제사리보, 청동사리합으로 구성된 사리구가 출토되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리구이다.

왕흥사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 왕궁이 있었던 부소산성과 백마강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백제의 사비성 시절에 도성과 가까운 중요한 사찰이었다고 한다. 왕궁에서 나룻배를 타고 백마강을 건너면 바로 찾아갈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누가 보아도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왕흥이라고 적힌 기와편이 현재의 절터에서 출토됨으로써 이 곳이 옛 왕흥사 절터임이 세상에 알려졌다.

<부여 왕흥사지(사적)>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세운 대표적인 사찰이다.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전형적인 1탑 1금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부소산성>

왕흥사지는 백제 궁성 뒷편 부소산성과 금강(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사비성의 관문이었던 구두래 나루>

왕흥사는 궁성에서 배를 이용해 왕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흥사지 들어오는 길>

<절터에서 출토된 ‘왕흥(王興)’이라 글자가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편>

일제강점기인 1934년 이곳에서 이 기와편이 출토되어 옛 문헌에 기록되어 있던 ‘왕흥사’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왕흥사지 절터(2010년 발굴.조사 당시 모습)>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1탑 1금당식 가람배치가 확인되고 있다.


<왕흥사지 가람 배치도>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축선상에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양쪽편에 건물지와 회랑지, 부속 건물 등이 있다.


<왕흥사지 발굴 당시 모습과 주요 출토 유물>

<왕흥사지 입구>

왕흥사지 배수로와 연결된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입구에 있다. 왕실과 관련된 사찰답게 나루터에서 사찰입구까지 연결되는 출입로가 있다.

<목탑터와 금당터>

<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구, 국보, 577년 백제,  1. 청동제 사리합, 2. 은제 사리 외병, 3. 금제 사리 내병>

바깥쪽에 청동으로 만든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제 사리합, 금제 사리병이 있다. 동, 은, 금으로 만든 용기에 사리를 모시는 백제 사리장엄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원통형으로 만들어진 사리합 바깥에는 6행 29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찰의 건립시기와 배경, 사리장엄구의 제작시기 등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리장엄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백제 사리엄장구를 확인하는 양식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목탑지 심초석의 사리공에 사리구를 넣고, 주칠로 연꽃넝쿨무늬를 그려 장식한 화강암제 뚜껑을 덮었습니다. 석제 장치 안에 청동합을 넣고, 다시 그 안에 은제 병, 그 안에 사리를 넣는 금제 병을 두었습니다. 석제 장치는 외함으로, 청동합은 내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청동합 몸체에 5자 6행 29자가 음각되었습니다.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혹은 찰주)를 세웠다. 본래 사리가 두 매였는데, 묻을 떄에 신이하게 셋이 되었다.”로 해석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금당터 뒷편 강당터>

<왕흥사지 동쪽 건물터>

앞쪽에는 회랑 건물터가, 안쪽에는 회랑 역할을 겸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있었다. 바깥쪽에는 부속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치미, 6세기 후반, 부여 왕흥사지>

왕흥사지 치미는 동쪽 승방지로 판단되는 건물지의 남북 양끝에서 각 1점씩 출토되었습니다. 전체를 한 몸으로 제작한 후, 상.하로 나누어 가마에서 구워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 건물에서 용마루 좌우의 치미 1벌(2점)이 함께 출토된 사례는 처음입니다. 남쪽 치미는 상부만, 북쪽 치미는 하부만 복원되었습니다. 치미의 추정 규모는 높이 123cm, 최대 너비 74 cm로, 중국 남조척(1자=24.5cm 전후)을 적용하면 5자 정도 높이에, 너비는 3자에 해당됩니다. 지붕장식을 화려함과 위엄을 갗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백제 최고 수준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찰의 중요 건축물에만 치미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알려진 사례와 달리, 승려들이 사용하는 승방건물에까지 치미가 쓰였다는 점에서 당시 승려들의 높은 지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도 주목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연꽃무늬 수막새와 벽돌, 6세기 후반, 부여 왕흥사지>

왕흥사지 치미의 배 부분에는 톱니무늬를 바탕으로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왕흥사지에서는 동일한 형태의 연꽃무늬 벽돌과 수막새가 출토되었습니다. 같은 기와에서 찍어낸 치미에 부착했음이 분명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서쪽편 건물터>

동쪽편과 대칭을 이루는 형태를 하고 있다.

<서쪽편 건물 안쪽 부속 건물터>

고려와 조선시대 건물터가 섞여 있다. 아마도 작은 규모의 사찰로 상당기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속 건물터.>

<절터에서 출토된 건축 부재들>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편들>

<사리 공양구, 철제관테, 577년>

<운모꾸미개, 577년>

<사리공양구, 1. 은제 허리띠 꾸미개, 2. 철제집게, 3. 성평 오수전, 중국 북제>

<사리공양구, 577년. 1. 금제 모자모양 꾸미개, 2. 금제 목걸이 꾸미개>

<3. 금구슬, 4. 금판>

<5. 흑옥구슬>

<6. 금실>

<사리 공양구, 577년. 1. 옥벽 조각, 2. 호랑이 모양 장신구와 진묘수 모양 장신구, 3. 곱은옥>

옥벽은 원래의 몸체에서 부채꼴 형태로 잘라낸 것을 다시 이등분하여 매납한 것입니다. 양면에는 음각으로 도철문 혹은 용문을 시문해 넣었습니다. 중국 한 무덤 출토품과 같은 형태입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4. 유리구슬>

<꾸미개 편, 부여 왕흥사지, 백제>

왕흥사지
왕흥사지(사적 427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창건(법왕 2년, 600)과 완공(무왕 35년, 634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왕흥(王興)’이라는 글자가 찍힌 기와편이 발견되어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목탑과 금당, 강당을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배치했으며, 사역(寺域)의 서쪽 경계에 배수로와 진입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목탑 터의 기둥 받침돌인 심초석에서 청동, 금, 은으로 만든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청동 사리함에는 ’577년 2월 15일에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리를 공양하고 절을 세웠다’는 글이 남아 있어, 문헌에 기록된 것보다 이른 시기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초석 주변에 8,000점이 넘는 사리공양구가 있었는데, 이는 공주 무령왕릉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 등과 같은 시기의 고분 출토품과 매우 유사합니다.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