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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묘골마을 도곡재, 후학을 양성하는 재실로 바뀐 한옥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마을에 있는 고택인 도곡재(陶谷齋)이다. 조선후기 정조 때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이 주택으로 처음 지은 집이다. 19세기에 인조 때 활동한 도곡공 박종우를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재실인 도곡재로 바뀌었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실로 사용하면서 약간 개조되어 일반 주택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고택이다.

달성군 묘골마을은 낙동강 동안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마을로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박팽년 후손은 사육신 가운데 유일하게 후손이 살아남은 가문으로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조선후기에는 관직에도 많이 진출했다. 양반들이 모여살았던 전통마을로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종가 건물이었던 태고정(보물)를 비롯하여 여러동의 고택들이 남아 있다.

<달성 묘골마을 도곡재>

18세기에 주택으로 지어졌다가 19세기에 후학을 양성하는 재실로 바뀌었다. 안쪽에 살림집인 안채가, 바깥쪽에 사랑채가 있는 마당을 넓게 쓰는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대문채>

도시형 한옥과는 달리 바깥쪽으로 창문을 두고 있지는 않다. 한쪽에는 외양간을, 반대쪽에는 문간방을 두고 있다.

<안쪽에서 본 대문채>

<사랑채>

앞면 4칸 규모로 바깥쪽에 사랑마루를, 안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사랑마루 옆에는 작은 툇간을 달아내어 누마루처럼 사용하고 있다. 19세기에 재실로 바뀌면서 개조한 부분으로 간략한 형태의 누마루이다.

<사랑채 누마루>

<누마루 앞에 있는 작은 연못>

<사랑채 뒷편에 있는 아궁이>

안채를 출입하는 작은 문이 있고 안마당에서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궁이 위에는 서책을 보관하는 다락을 설치했다.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채>

사랑채가 있는 마당을 향해 문을 두고 있는 온돌방이 있는데 작은 사랑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마당에서 본 중문채>

<살림집인 안채>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과 부엌을 배치한 ‘ㄱ’자 형태의 건물이다.

<안채 대청마루>

<안채 동쪽끝>

안채 한쪽끝 아궁이 위에 큰 다락방을 만들었다. 서책을 보관하는 장소로 보인다.

<다락방 아래 아궁이>

<옆쪽에서 본 안채>

<안마당 안쪽편에 있는 고방채>

<고방채 다락방과 그 아래 공간>

<달성 묘골마을 전경>

도곡재는 종가에 해당하는 태고정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도곡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도곡재는 사육신 중 한 분인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묘골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이 1778년(정조2)에 주택으로 건립하였던 것을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선생이 호를 따라 도곡재라 부르게 되었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문신으로 낙재 서사원을 사사하였고 한강 정구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의 행의가 추앙되었다고 대구읍지 증에 기록되어 있다. 도곡재는 조선시대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실례를 잘 보여주며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이 3개 권역으로 분리되어 일곽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좌측으로 낸 대문채를 들어서면 남향하여 사랑채에 해당하는 도곡재가 자리하고 사랑채 우측에 연한 중문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안채와 우측의 고방채가 자리하여 튼 구조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인 도곡재는 원래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였으나 후대에 재실로 사용하면서 왼쪽에 퇴칸 1칸을 달아 내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다. (안내문, 달성군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달성군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