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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신라실] 문자로 보는 신라, 신라문화의 지방확산

6세기에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갖추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소갈이와 수리시설의 보급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나라이름을 ‘신라’라 칭하고 ‘왕王’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율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군사적인 경쟁력을 갗추면서 진흥왕때는 영토가 한강유역과 함경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 국가로서 신라의 모습은 여러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문자를 새겨놓은 비석들이다.

특히, 진흥왕 순수비와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이 화장된 영토를 순수하면서 기념으로 새겨놓은 비석들로 당시의 관직체제, 인물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영역을 보여주는 유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진흥왕순수비 이외에도 신라는 국가정책 등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글자를 새겨놓은 비석을 많이 활용했는데, 그 내용은 법의 시행, 국왕의 순시, 댐과 성 등 토목사업의 과정과 책임소재 등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비석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영역 전체에 걸쳐고 고루게 분포되고 있어서 국가운영의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지방관과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돌방무덤이나 토기에서 신라문화의 확산된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 영역내 지방에서 발견되는 비석이나 목간 등의 문자자료에서도 신라가 정복지 주민에 관직을 주거나 세금을 매기는 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문자로 보는 신라.

삼국시대 신라인들의 문자생활을 보여주는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한 주요 비석들과 일상생활에 사용한 목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금속유물에 새겨진 문자
5~6세기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는데, 신라에서 문자가 사용된 초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허리띠끝장식과 청동그릇 등에 새겨진 ‘부인대夫人帶’, ‘대부大富’ 등의 글씨는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로 된 문자라고 해야 할 정도다. 그러나 호우총과 서봉총에서는 ‘광개토지호태왕廣開土之好太王’이나 ‘태왕太王’ 등과 같이 고구려의 왕을 지칭하는 용어와 제작연대.제작자.용량 등 여러 내용이 새겨진 그릇이 출토되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수延壽’명 은그릇, 삼국시대(신라) 454년, 경주 서봉총,

얇은 은판을 두드려 만든 합으로 그릇의 바닥과 뚜껑 안쪽에는 연수 원년인 신묘년 3월 대왕(大王)이 3근6량을 사용하여 만들다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연수라는 연호는 동아시아에서 확인되지 않는 연호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부大富’명 청동그릇,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황오동 무덤,

청동그릇의 바닥에 ‘대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 신라에서는 다양한 그릇에 큰복(大福)과 같은 길상과 관련된 내용이 확인되기도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德業日新 網羅四方”,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하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 삼국시대(신라) 진흥왕16년(555), 서울 북한산 비봉,

 진흥왕의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을 둘러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활약과 강력한 왕권, 당시의 관직제도와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진흥왕 순수비에 적혀 있는 글자들.

북한산 비봉에 있었던 비석으로 지금은 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진흥황 16년(555)에 세워진 것으로 진흥왕이 확장된 영토를 순수하면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황초령,마운령,창녕에 4기의 순수비가 있으며, 단양 적성비를 비롯하여 다수의 순수비가 전국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순수비 옆면과 뒷면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져 있었던 북한산 비봉

넓어진 영토에 기념비를 세우다.
신라는 6세기에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법과 문서를 통하여 지방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 각지에 세워진 비석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지증왕과 법흥왕대의 비문에는 법을 통하여 정복한 지역을 통치하고 지방의 분쟁을 조정하였으며, 더 나아가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지방의 주민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진흥왕은 정복사업으로 새로 차지한 영토인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에 4개의 순수비(巡狩碑)를, 단양에는 적성비(赤城碑)를 세워 이를 기념하였다. 이들 비석에는 진흥왕이 신라영역으로 새로 편입된 지역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을 포항하며, 신하들이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뚜껑합, 삼국시대(신라), 포항 냉수리 돌방무덤

포항 냉수리 신라비, 국보, 복제품, 삼국시대(신라) 503년, 포항 냉수리,

503년 신라지배층이 포항 냉수리 지역의 호족이 절거리(節居利)에게 재물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명령을 내린 비석이다. 지배귀족이 의논하여 명령을 결정하고 이후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 뒤 비석을 세웠다. <출처:중앙박물관>

냉수리고분
영일냉수리신라비가 발견된 곳 주변에는 많은 무덤이 있는데 주로 돌방무덤이다. 1990년에 조사된 대형의 돌방무덤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옆방이 딸린 무덤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냉수리무덤과 냉수리비,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중성리비 등을 통해 볼 때 포항 일대는 삼국시대 신라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즉 지리적인 위치나 교통로 등 고구려와 접경지면서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요충지로 일찍부터 신라의 성장 과정에서 정치.군서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포항 중성리 신라비, 복제품, 삼국시대(신라) 501년,

포항 중성리, 비문 맨 앞에 나오는 ‘辛巳’는 이 비가 건립된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신라 지배층이 포항 중성리 지역 호족에게 명령을 내려, ‘궁宮’, 즉 토지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조정한 내용에 대해서 기록한 비석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신라 비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부정형의 자연석으로 한 면에만 음각을 하였다. 이 비가 발견된 지점은 ‘영일 냉수리비(국보264호)’가 발견된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8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댐을 쌓고 논에 물을 대다.
6세기 신라는 소갈이(牛耕)와 댐의 보급을 통한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법흥왕대에 전국적으로 댐을 만들거나 보수하는 사업이 시행되었다. 제방을 축조하면서 물의 흐름을 제어하여 하천 주변의 땅을 개발하여 농경지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논농사도 발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영천 청제菁堤를 쌓으면서 기록한 ‘청제비’와 대구에 있는 제방을 만들면서 쓴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 드에 남아 있는데, 청제비가 세워진 곳에는 아직도 저수지가 남아 있다.

영천 청제비 탁본, 삼국시대(신라) 536년, 영천군 금호면 도남동, 

영천 청제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면서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비 높이는 130cm 정도이며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비의 양면에 각각 다른 시기에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앞면에는 병진년인 법흥왕 23년(536)에 처음으로 청제를 건립하면서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동원한 인원수, 공사관계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정원貞元 14년인 원성왕 14년(798)에 청제를 새로이 수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돌에 글을 새겨 세상에 보이다.
6세기 신라에서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금석문이 많이 제작되는데, 앞 시기에 단편적으로 문자를 사용하던 단계와 비교하여 문자 발달사상 중요한 전환기가 된다. 특히 단단한 돌에 글자를 새긴 비문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비문의 내용은 나라의 법 시행(律令), 국왕의 지방순시(巡狩), 댐과 성을 만든 과정과 책임소재(築堤, 築城) 등 국가에서 행한 공식적인 일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비문을 새긴 비석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산성이나 댐의 주변, 성벽, 교통로 등에 세웠다. 신라 전 영역에 걸쳐 분포하는 비석은 국가에서 중요한 사안을 돌에 기록하여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이를 영구히 보존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남산신성비 제1비, 복제품, 삼국시대(신라) 591년, 경주 탑동,

남산신성비는 591년(진평왕13) 신라 왕경인과 지방민을 동원하여 경주 남산에 신성을 쌓고 건립한 비석이다. 현재까지 10개가 발견되었으며, 비문에는 “신해辛亥 2월21일에 남산신성을 쌓을 때 법에 따라 쌓은지 3년 안에 무너지면 죄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하게 한다.”라는 서약 부분으로 시작하여 성을 쌓은 것과 관련된 사람들과 공사한 거리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1비는 1934년에 발견된 것으로 화강암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비문에는 9행 169자가 새겨져 있다. 지금 함안 일대의 아량阿良촌의 지방민이 남산 신성 축성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의 지방통치 체제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안압지 출토 명활산성비, 삼국시대(신라) 551년, 경주 안압지

체계적으로 지방을 다스리다.
신라는 주변 소국을 점령하여 신라의 지방으로 만들었는데, 6세기에는 전국에 주州와 군郡을 설치하고 성城.촌村(후대의 현縣)까지 군주軍主.나두邏頭.도사道使 등의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파악과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지방관은 촌주村主 등 지방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세금을 걷고, 지방민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도성이나 지방의 주요 지역에 성을 축조할 때 전국 각지에서 지방민에게 노동력과 물자를 걷어 공사를 수행하였다. 당시 축성築城과 관련된 남산신성비와 명활산성비에는 도사가 파견된 촌村단위로 작업구역이 할당되어 세밀한 공사가 진행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비석
6세기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갖추고 대내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소갈이와 수리시설의 보급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나라이름을 ‘신라新羅’라 정하고 ‘왕王’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율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으며, 독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낙동강과 한강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다. 신라는 6세기에 정복한 지역을 신라지방으로 편성하였고 확대된 영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문서행정을 통해 통치하였다. 이렇게 신라인이 남겨놓은 역사의 흔적은 신라인들이 직접 써놓은 문자에서 더욱 뚜렷하게 찾을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삼국시대를 이야기 할 때 지방에 대해서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그 유물들은 그리 많이 남아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신라에서도 지방통치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보은의 삼년산성, 여주의 파사산성, 파주의 칠중성 등 남한강 유역을 비롯한 주요 교통로에 쌓은 견고한 산성이나 진흥왕 순수비나 각종 비석에서 지방통치에 대한 여러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산성 이외에는 지방통치와 관련된 유물로는 경주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산성을 쌓을 때 지역별로 축성책임을 할당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긴 남산신성비에서도 지방의 이름들이 등장하며,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도 각 지역의 조세납부와 관련된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지방통치와 관련하여 많지는 않지만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목간木簡, 삼국시대(신라), 함안 성산산성

성산산성은 조남산鳥南山 위 능선을 따라 자연돌 또는 깬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둘레는 약 1,400m이다. 문지門址와 성벽, 내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내부 저수지에서 많은 목간이 출토되어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60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에는 급벌성.감문성.구리벌.고타.추문 등과 같은 이미 알려진 지명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비문과 기록에도 나오는 지명이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경북 북부 일대로 추정되며, 당시 상주上州지역에서 거두어들인 물건을 낙동강을 이용하여 하주下州지역에 있는 성산산성까지 운반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꼬리표 목간

꼬리표 목간은 곡물이나 물건을 담은 짐꾸러미를 묶은 끈에 꽂은 것으로 앞부분이 뾰족하거나 양옆에 홈을 내어 고정하게 하였다.
*신라사람들이 사용한 한자 ‘石’에는 두가지 의기가 있었다.
①글자 그대로 돌을 의히하는 ‘석’이라고 발음하며, 한자로 ‘石’을 사용하였다.
②곡물을 세는 단위인 섬을 의미하며, 당시 발음은 확인하기 곤란하나 한자로 ‘丿口’을 사용하였다. 성산산성 목간에 보이는 石은 돌이라기 보다는 섬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급벌성(及伐城), 현지명 경북 영주,급벌성에 사는 문시이와 조벌척 두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 섬추문(鄒文), 현지명 충북 단양 부근, 추문군 전나모지촌에 사는 이리습이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곡물). 고타(古陀), 현지명 경북 안동, 고타군 이골리촌 아나마을에 사는 _지와 복지고리 두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를 발송하다.

구벌(仇伐), 현지명 경북 의성 부근, 구벌군 간호_촌 비시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 섬. 구리벌(仇利伐), 현지명 경북 상주, 구리벌군 상삼자촌에 사는 걸리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곡물), 감문(甘文), 현지명 경북 김천, 감문성 아래 보리는 본파군 대촌에서 사는 모리지가 세금으로 낸 (보리) 한 섬

매약촌(買若村), 매약촌에 사는 고광사진우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 섬, 물사벌(物思伐), 물사벌성에 사는 두지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 섬

문자와 지방
신라는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 5년(685) 전국을 9개의 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과 현을 두는 주군현 체제를 완성했다. 또한 5개의 소경을 설치하여 지방지배를 강화했으며, 말단 행정 구역으로 촌을 설치했다. 촌에는 대략 10여가구 100여 명이 살았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천 주변이나 들판에서 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으며, 소와 말을 키우거나 잣, 호두 등을 재배했다. 촌에 대한 국가의 지배는 촌주의 협력 아래 이루어졌으며, 촌주 중 일부는 후삼국시대에 호족으로 성장해서 새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정비된 지방제도를 바탕으로 행정력이 지방 곳곳에 미치게 되고 소경과 주치 등에 귀족들이 이주하면서 왕경 문화는 지방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각지에서 출토되는 문자 자료는 당시 지방문화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로 보아 당시 지방에서 문자생활이 보편화되었으며 그 수준도 왕경에 버금갔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 문화의 확산
신라는 법흥왕과 진흥대에 걸쳐 낙동강유역의 가야를 흡수하고, 고구려.백제와 겨루어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새롭게 신라 영토로 들어온 지역에는 신라의 통치력이 미치게 되면서 신라 문화가 들어갔다.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지방관과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돌방무덤이나 토기는 이 시기 신라의 지방 지배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각지에서 발견된 비석이나 목간 등의 문자 자료에도 신라가 정복지의 주민을 흡수하여 관직을 주거나 세금을 매기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신라 문화의 확산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