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중앙박물관특별전, 철의 문화사]철, 권력을 낳다

철기 사용에 따른 생산력 증가는 고대국가 성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고대국가에서는 철은 권력의 기반에 되었으며 당시 지배층들은 권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철을 무덤에 많이 묻었으며 여러 고고학적 발굴.조사과정에서 이런 사실들이 확인되고 있다. 무덤에 같이 묻히는 철기는 무기류를 비롯하여 생산이 필요한 농기구, 철기를 만들 수 있는 원료인 덩이쇠 등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껴묻거리들은 삼한시대 유적들에서부터 시작되어 삼국시대 고분 등 다양한 지역과 시기에서 확인되고 있다.

철, 권력을 낳다
2부에서는 한반도에 철기가 등장한 후 철이 본격적으로 이용되면서 나타난 모습을 살펴봅니다. 철기의 등장은 곧 생산력의 증가와 군사력의 신장으로 이어져 철을 소유하려는 지배자의 욕망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철을 얼마나 소유했는지가 권력을 상징하는 지표가 되었고 철과 권력의관계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되었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은 다시 철제 무기의 발달을 가져 왔습니다. 철이 만들어 낸 생산력 증가가 ‘성장’을 의미한다면,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전쟁은 ‘파괴’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철이 갖고 있는 양면적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큰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를 통해 결정된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생산과 권력
철기의 사용은 생산력의 증가로 이어져 사회제도와 계급의 세분화를 가져 왔습니다. 이렇게 철기 사용과 생산력 증가는 사회를 고도화시켜 고대국가 성립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고대국가에서 철은 지배층만이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무덤에 많은 철기를 넣는 것은 권력자의 특권이었습니다. 고대부터 중세 근세에 이르기까지 철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며 권력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해 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쇠도끼, 재현품, 변한, 창원 다호리>


<쇠도끼, 재현품, 변한, 창원 다호리>


<쇠낫, 재현품, 변한, 창원 다호리>

따비와 삽날
따비와 삽날은 농사짓는 데 사용한 대표적인 도구입니다. 따비는 농경문 청동기에 표현되어, 기록으로 남은 첫 번째 농기구로서 자리매김했습니다. 철로 만든 삽날은 나무로 만든 삽 머리에 끼워 사용합니다. 주로 땅을 파거나 뒤집는 기경구로서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가래와 같은 용도로 사용합니다. 삽날은 쇠스랑과 함꼐 농업 기술의 발전을 알려 주는 척도가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따비, 재현품, 변한, 창원 다호리, 2. 따비, 진한 , 대구 팔달동, 3. 삽날, 마한, 김포 운양동, 4. 삽날, 마한, 가평 대성리>

여러 종류의 쇠도끼
도끼 모양을 한 철제 도구를 쇠도끼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날이 양쪽에 있는가 한쪽에 있는가를 기준으로 도끼나 자귀, 괭이와 같은 쓰임을 추측하고 있ㅅ브니다. 실제 발견되는 고대의 쇠도끼는 훨씬 더 다양한 모양을 띱니다. 쇠도끼의 다양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고대 사회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마한. 가평 대성리>

<2. 삼국, 충주산성,>

<3. 백제, 오산 수청동>

<4. 진한, 대구 팔달동, 5. 삼국, 부산 복천동>


<돌낫과 쇠낫 1. 쇠낫, 고구려, 홍련봉 2보루, 2.쇠낫, 마한, 가평 대성리, 3. 쇠낫, 진한, 대구 팔달동, 4. 돌낫, 청동기, 산청 소남리>

쇠도끼의 생산력
실제로 돌도끼와 비교하여 쇠도끼는 얼마나 효율적일까요? 윌리엄 타운센드는 직경 20cm의 나무를 베는 실험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각각 시간을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돌도끼는 평균 12분, 쇠도끼는 평균 3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게다가 쇠도끼는 나무를 베어 낸 후 날을 세우기 위해 가는 횟수가 돌도끼보다 훨씬 적어 4배 이상의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돌도끼, 청동기, 응기 송평동, 2. 돌도끼, 청동기>

<3. 주조로 만든 쇠도끼, 마한, 가평 대성리>

상징성과 권력자
무덤의 크기와 그 안에 넣은 부장품은 무덤 주인의 정치.경제적 힘을 보여 줍니다. 우리나라 고대 무덤에 부장된 철기는 처음에 농기구 한 두 점만 들어가다가, 나중에는 칼과 같은 무기가 함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철을 만들기 위한 소재를 화폐처럼 넣었습니다. 무덤에 무기를 부장하는 것은 사자가 생전에 용맹한 전사였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고, 철기 소재를 대량 부장하는 것은 소유에 대한 강한 집념의 상징일 것입니다. 철의 소유는 당시 권력자의 특권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변진은 철을 생산하는데, 한.예.왜가 모두 와서 가져간다. 또 낙랑군과 대방군에도 공급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진조 –

고조선의 철기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 유적에서 나온 철기는 연나라의 영향을 받았고, 한반도 여러 지역의 초기 철기 문화와 관계가 깊습니다. 그중 주물로 녹여 만든 농.공구는 고조선과 삼한의 철기 문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최근 학계에서는 용연동 유적 철기를, 연나라 영향을 받은 랴오닝 지역의 독자적인 철기 고조선의 철기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용연동 유적의 철기, 초기 철기, 위원 용연동>

<용연동 유적의 철기, 초기 철기, 위원 용연동>

마한의 철기
삼한 중 마한이 가장 먼저 연나라의 철기를 받아들였습니다. 마한의 철기는 대부분 주물로 녹여 만든 쇠도끼, 쇠낫과 같은 농.공구였습니다. 마한 사람들은 철기를 귀하게 여겨 지배자들의 무덤에도 넣었지만, 스스로 철기를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한은 이후에도 한반도 북부지역에 있는 고조선과 낙랑군의 철기 문화에 영향을 받지만 독자적인 철기 문화로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갈동 유적의 철기, 마한, 완주 갈동, 2. 신풍 유적의 철기, 마한, 완주 신풍>

<3. 남양리 유적의 철기, 마한, 장수 남양리>

진한과 변한의 철기
진한과 변한은 마한보다 늦게 철기를 받아들이지만, 일찍부터 스스로 철기를 만들려고 시도하여 독자적인 형태의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외날 따비, 철제 단검, 측면에 융기선이 있는 쇠도끼 등은 진한과 변한 권역에서 보이는 철기들의 특징입니다. 진한, 변한 권역의 철기 문화는 가야, 신라의 철기 문화로 이어져 우리나라 고유의 철기 문화를 이끌어가는 토대가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팔달동 유적의 철기, 진한, 대구 팔달동>

<1. 팔달동 유적의 철기, 진한, 대구 팔달동>

<1. 팔달동 유적의 철기, 진한, 대구 팔달동>

<2. 월성동 유적의 철기, 진한, 대구 월성동,>


<3. 임당동 유적의 철기, 진한, 경산 임당동>

< 4. 다호리 유적의 철기, 변한, 창원 다호리>

상징의 지속
살포는 농사에서 물꼬를 막고 트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추정됩니다. 살포는 실제 사용된 도구라기보다는 당시 치수를 주관하던 통치자가 지녔던 상징적인 도구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살포는 주로 고대의 수장층 무덤에서 출토되며,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연로한 재상에게 하사하는 궤장 중의 하나였습니다. 살포가 갖는 권력의 상징성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궤장을 하사하는 연회와 기로회, 1623년,>

<2. 안석과 지팡이, 조선>

<3. 살포, 가야, 창원 가음정동, 4. 살포, 조선, 양주 회암리>

철의 독점, 황남대총
고대국가가 조직적으로 철기를 생산하고 지배층이 철기를 독점한 사례를 신라 황남대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황남대총에는무기부터 농.공구에 이르는 다양한 철기들이 대량으로 묻혀 있었습니다. 그 수량만 해도 3,200여 점에 이릅니다. 이 중 당시 철기 생산 소재이면서 화폐와 같은 가치를 가졌던 덩이쇠의 수량만 해도 상당합니다. 이 덩이쇠를 일렬로 늘어 놓으면 약 243 m, 여의도 63빌딩 정도의 높이와 맞먹을 정도라고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쇠거울, 신라, 경주 황남대총>

<2. 덩이쇠, 신라, 경주 황남대총>

<3. 쇠솥,신라, 경주 황남대총>

덩이쇠
진한, 변한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덩이쇠는 단조 쇠도끼의 날 부분이 사라진 긴 철판으로 위아래 양쪽 끝부분이 넓게 펴지는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덩이쇠는 철기 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중간 단계의 소재로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확인되며, 일본에서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덩이쇠가 많이 출토됩니다. 덩이쇠는 철기의 재료로서 유통을 위한 용도 외에도 지위를 과시하는 위신재나 화폐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가야, 함안 도항리>

<2. 가야, 김해 대성동>

<3. 백제, 충주 탄금대토성>

등울
등울은 돌방무덤 안에 등잔을 올려놓는 등잔받침입니다. 대구 비산동 돌방무덤에서 철로 만든 등울 두점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등울을 버티는 살대 위에 평면 받침대가 놓여 있고, 다른 하나는 원통형 망 안에 등잔을 넣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등울은 죽음의 공간 안에서도 불을 밝혀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권력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등울, 삼국, 대구 비산동>

고리자루 큰 칼
고리자루 큰 칼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됩니다. 이 칼은 값비싼 재료를 활용하여 금은 장식을 한 큰 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둥근 고리 안쪽에 용과 봉황 같은 동물 모양을 세공한 큰 칼로 발전합니다. 고리자루 큰 칼은 대부분 권력자의 무덤에서 나오므로 당시 권력자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마한, 고창 남산리, 2. 가야, 고령 지산동>

<3. 신라, 경주 황남대총, 4. 백제, 논산 모촌리, 5. 뱀모양 칼, 삼국, 임실 금성리>

<금은입사 사인검, 조선>

칼이 가진 상징성은 선사에서 고대, 중세, 근세로 이어집니다. 칼은 당시 유행에 따라 재질과 형태가 달라지지만, 강력함을 드러내는 칼의 속성은 권력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유지됩니다. 백제가 일본에 전해준 것으로 유명한 칠지도, 뱀처럼 구불구불한 사행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의미의 사인검, 용이 장식된 자루를 가진 조선시대 왕의 어도, 대한제국 왕실의 칼인 예도 등은 철로 된 칼이 권력의 상징으로 지속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1. 어도, 조선,>

<2. 예도, 대한제국, 3. 곤봉, 조선>

  1.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7년
  2. 위키피디아,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