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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노안당, 흥선대원군이 거처했던 구한말 정치의 중심지

구한말 역사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흥선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이다. 이곳은 고종이 태어나 12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면서 국왕이 살았던 사가(私家)인 잠저가 되면서 운현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운현(雲縣)은 창덕궁 정문 서쪽편 운현궁이 위치한 관상감 앞 고개를 가르키는 이름이다. 고종이 즉위하고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집정을 하면서 그 규모가 크게 확장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어다. 고종 즉위 이듬해인 1864년에 노락당(老樂堂)과 노안당(老安堂)이 지어졌으며, 1870년에 안채인 이로당(二老堂)이 완공되었다.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전에 살았던 잠저(潛邸)이지만 당시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이 살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한 유림세력들의 견제가 심하지 않았기때문에 크게 확장되어 궁궐과 비슷한 규모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궁궐밖 사가(私家)에서 머물다 즉위한 왕으로는 영조를 비롯하여 인조, 철종, 고종 등이 있는데 이들이 머물렀던 곳을 잠저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잠저 중에서는 철종의 잠저인 강화 용흥궁과 운현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운현궁 솟을 대문>

<안쪽에서 본 모습>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흥선대원군이 거처했던 운현궁 솟을대문이다. 운현궁은 즉위하기 전 고종이 살았던 잠저로 사대부 저택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양쪽으로 지금은 매표소로 사용하고 있는 문간방이 있다.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구한말 정치의 중심

운현궁 사랑채인 노안당으로 대원군이 직접 이름을 짓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이다. 이 곳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일상에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노자를 안지’하며 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노안당 건물은 구한말 당시에 유행했던 사랑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기거했던 건물임에도 일반 한옥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으며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遮陽)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안당 행랑채와 솟을대문>

일반 사대부저택 사랑채에 해당하는 노안당은 운현궁에서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운현궁 노안당>

구한말 정치의 중심지로 흥선대원군이 기거했던 운현궁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이다. 전통 한옥의 사랑채를 확장해서 구한말 한옥의 특징인 정자와 같은 누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노안당은 정면 6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있다. 가운데 2칸은 온돌방, 양쪽으로는 대청마루로 되어 있다.

<노안당 현판>

노안당(老安堂)은 ‘노자를 안지’하며에서 딴 이름으로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원래 있던 현판에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지금의 것은 최근에 모각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건물 기둥에 달아 놓은 주련>

<툇마루>

앞면과 옆면에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두고 있으며, 정자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대청마루>

노안당 왼쪽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다. 침대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볼 때 흥선대원군이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공간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난을 그리고 있는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친척인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고, 묵란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추사는 그의 묵란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평상시 복식을 하고 추사의 글로 만든 병풍 앞에서 묵란을 그리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난을 그리고 있는 흥선대원군>

대청마루에는 흥선대원군이 난을 그리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추사 김정희에게 글과 그림을 그렸으며, 그의 글과 그림은 당시에도 꽤 유명했다고 한다.

<온돌방>

가둔데 2칸은 흥선대원군이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공간으로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고종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봉사식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사진은 영의정 김좌근이 배석하고 도승지 민치상이 교지를 받치는 모습이다.

교서를 받은 고종과 그 자리를 배석하고 있는 흥선대원군

봉사식
봉사식은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의식으로 영의정과 도승지가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다. 고종은 복건에 청도포를 입고 백사대를 착용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흑단령을, 영의정 김좌근은 조복을, 도승지 민치상은 청단령을 착용하였다. <출처:서울시청>

<누마루>

<누마루 내부>

노안당 오른편에는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누마루 내부는 꽤 넓은 편으로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모임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운현궁 노안당이 구한말 정치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주춧돌>

일반 누마루와는 달리 벽돌로 내부를 막아 놓고 있다.

<뒤에서 본 모습>

<아궁이와 굴뚝>

<온돌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

윗쪽으로는 책 등을 보관하는 다락이 있다.

<노안당 행랑채>

<온돌방>

<온돌방에서 대기하는 사람>

흥선대원군을 위해서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나 흥선대원군을 호위하던 사람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흥선대원군을 호위하던 천하장안이라 불리던 사람 중 천희연이란 사람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천하장안
천하장안은 흥선대원군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로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 등 네명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개인 경호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천하장안 중 한명인 천희연이 창의 위에 청색 호의를 착용하였다. <출처:서울시청>

<안채인 노락당을 출입하는 중문과 행랑채>

<2011년 가을 노안당 입구>

운현궁 노안당(老安堂)
운현궁에서 사랑채로 쓰였던 노안당은 대원군의 일상 거처였으며 파격적인 인사정책, 중앙관제복구, 서원철폐, 복식개혁 등 국가 주요 정책을 논의했던 곳이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오늘날 이 곳에만 남아 있는 특징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노자를 안지하며’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말년에는 정권에서의 퇴진과 청나라에 납치되는 등 이 곳에서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현재 노안당에 게시된 편액은 2006년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중요 무형문화재 제106호 오옥진 각자장에 의해 모각되어 게시된 편액이며, 원 편액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운현궁 수직사와 행랑채.

운현궁 출입문인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원군이 거처했던 사랑채인 노안당을 들어가는 출입문이 보이고 오른쪽편에 운현궁에 소속돤 관리들이 거처했던 수직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고 한다. 솟을대문 북쪽으로는 물품을 보관하던 광으로 쓰였던 긴 행랑채와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지금은 이곳에서 각종 문화행사를 하기 위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행랑채와 운현궁 사이의 넓은 마당>

솟을대문이 있는 입구 행각과 운현궁 건물들 사이에는 넓은 마당이 있다. 마당 한쪽 끝에는 상설공연이나 문화행사를 위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마당 뒷편으로 현대그룹 빌딩이 보이는데, 옛 관상감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조선시대 관상감 앞을 지나는 고갯길을 운현(雲峴)이라 불렀으며, 운형궁은 고개이름에서 딴 것이라 한다.

<운현궁에 소속된 관리들이 거처했던 수직사 건물>

구한말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의 권세가 막강해서 상당히 많은 관리들이 운현궁에 파견되어 근무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앞면 8칸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궁궐이나 관청의 행랑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방과 마루>

수직사는 관원들이 거처하던 공간으로 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쪽에 툇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수직사 온돌방>

<마루방>

<수직사 앞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

<행랑채와 운현궁 건물들 사이 넓은 마당>

운현궁, 사적,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1863년 12월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부근의 고개이름인 운현(雲峴) 또는 관현(觀峴)를 따 운현궁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매표소를 통과해 오른쪽으로 수직사가 있고 여기를 지나 정면으로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운현궁의 사랑채가 보이는데 이 건물이 노안당이다. 정문 우측에 위치한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