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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거리, 조선시대 의정부와 육조가 있었던 광화문대로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의정부와 6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던 거리로 법궁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현재의 광화문 4거리까지 조성된 대로를 말한다.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과 더불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중요 관청들로 국가를 상징하는 거리라 할 수 있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조선시대 관청 건물들은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현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1960년대까지 있었던 삼군부 청사 건물과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앞에 있었던 종친부 건물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육조거리 동쪽편에는 국가 최고 의사결정기구라 할 수 있는 의정부를 비롯하여 이조, 서울시청이라 할 수 있는 한성부, 재경부라 할 수 있는 호조, 국가원로들을 위한 공간인 기로소가 들어서 있고, 서쪽편에는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예조를 중심으로 감사원격인 사헌부, 주요 정책을 집행하는 병조, 형조, 공조를 비롯한 크고 작은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다. 육조거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국가 행정의 중심 기관들이 계속들어 서 있었으며, 지금도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광화문 4거리의 교보빌딩과 맞은편 상업시설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국가 또는 공공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육조거리 모형>

조선시대 중앙의 관아 건물들의 그 성격과 지위 등에 따라서 건물의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정승에 해당하는 의정부와 육조 관아 건물들은 대개 비슷한 규모를 하고 있었으며, 광화문 육조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 삼군부 청사나 종친부 건물과 비슷하게 중앙에 크고 웅장한 정청 건물을 두고 양쪽에 날개채를 두고 있으며, 실무관헌들이 근무하는 크고 작은 행각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역사박물관에는 조선시대 광화문 육조거리 모형을 만들어 전시 놓고 있다. 시대에 따라서 다른 관청들이 들어설 수 있었겠지만,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정도전 등이 건설했던 한양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육조거리는 광화문 앞의 대로를 이르는 명칭으로 의정부나 육조와 같은 국가의 중추적인 관청들이 늘어서 있었다. 높은 장랑이 양쪽으로 열 지어 있는 너비 약 60m의 이 거리는 왕도의 중심가로인 주작대로였다. 이곳은 경복궁과 함께 왕이 사는 도시의 상징이었으며, 왕과 백성이 만나는 소통의 거리이기도 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공원으로 조성된 광화문 광장>

조선시대에는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를 비롯한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어 육조거리로 불렸다. 지금도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하여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다. 경복궁 외조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도성도, 1861년경, 보물 1358-1호>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중의 한양 지도로 도성 안의 주요 지리정보를 묘사하고 있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조선시대 중앙관청 건물 중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바깥쪽에 있었던 종친부 정청 건물인 경근당(왼쪽), 별채 건물인 옥첩당이다. 육조거리 모형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의정부나 육조 등 중요한 관청건물들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건물은 정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채에 해당하는 부속건물, 그리고 정청 앞 마당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행각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정부(議政府)>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지금의 국무총리실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관청이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있어 이들의 합의로 국가 정책을 의결하였고, 그 아래에 육조를 두었다. 의정부는 조선 최고의 정부기관답게 정청 건물을 중심으로 많은 행각과 부속 건무들로 이루어졌다. 정청 뒷편에 연회를 할 수 있는 큰 누각과 연못을 두고 있다.

<이조(吏曹)>

중앙의 인사행정기구로 오늘날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문관의 인사, 국가의 공훈에 관한 사무, 관리의 근무성적 평가 등을 담당하였다. 육조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이조는 실무적인 성격을 갖는 기관으로 많은 행각을 두고 있지는 않다.

<의정부가 있던 곳>

의정부가 있었던 자리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오랜 기간동안 정부대변인 역할을 했던 공보처, 문화부 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조가 있었던 자리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경아전
경아전은 중앙관서의 서리를 말하는 것으로 녹사와 서리 등으로 구분되었으며, 행정 말단에서 문서를 관리하는 하급관리였다. 이들은 양반들이 천시했던 회계나 문서에 관련된 중앙관서의 실무를 도맡아 했기에 행정에 능통하고 어느 정도 문학적 소양도 가지고 있었다. 선발.충원 방법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과거가 아닌 취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권세가의 청탁을 통해 권세가의 겸인(청지기)들이 경아전으로 진출하게 되어 취재조차 없어지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중앙의 기관 가운데 권력이 집중되어 있거나 국가와 왕실의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관청을 중심으로 서리직의 세습화 경향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집안으로 영월엄씨, 선산백씨, 남원유씨 등이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이학지남, 1458년.>

이학지남은 일종의 행정.법률 사전으로 내용은 크게 세부류로 나뉜다. 공문서에 사용하는 행정용어에 대한 해석과 법률용어에 대한 해석, 그리고 관리들의 행동지침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관리의 덕목과 자질, 모범 관리들의 사례 등도 적혀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유서필지, 19세기말~20세기초.>

조선시대 공문서 작성지침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유학자와 서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조선시대 공문서의 서식 등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행정 사무용 지침서이다. 상언.단자.고목.문권 등과 같은 공문서들의 서식, 이두사용법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행정업무를 담당한 목민관, 서리들 뿐 아니라 일반 평민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참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을 관리하는 사람들
한성부(漢城府) 수장은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 판윤은 정2품의 중앙관직으로 6조의 판서와 같은 품계이다. 좌윤과 우윤(종2품)은 제1.2부시장에 해당한다. 그 아래에는 서윤과 판관 각각1명, 주부2명을 두었는데 서윤은 이방, 판관은 호방, 주부2명은 각각 예방과 병방, 형방과 공방의 일을 맡았다. 곧 6방 체제로 운영된 것이다. 소속관청으로는 중부를 비롯하여 동.서.남.북부가 있었으니 이들은 오늘날의 구청에 해당한다. 각 부의 수장으로는 영(종5품)을, 그 아래에 도사(종9품)을 두었다. 또한 부의 아래에는 방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계가 있었다. 고종 때에는 5부 아래에 47방과 340개의 계가 있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성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청에 해당하는 관청으로 한양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도시 시설의 설치.운영을 총괄하는 곳으로 한양의 행정 및 사법을 관장하였다.

<한성부 입안, 복제>

입안은 조선시대 관청에서 개인에게 발급해주는 인증서로, 특히 이 입안은 1395년 한성부가 설치된 후 발급된 최초의 문서이다. 입안에는 1397년 10월 세자우필선인 정구에게 훈도방의 집터 15부를 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문서 뒤에는 판사 1명과 소윤 2명, 판관 2명, 참군 1명이 서명하여 그 사실을 확인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호조(戶曹)>

인구 및 재정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한다. 호구의 관리, 각종조세의 수취, 식량과 재화의 관리 등 국가의 재정과 경제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다른 관아에 비해 행각이 많은 것으로 볼 때 보관하고 있던 문서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부와 호조가 있던 곳>

한성부와 호조가 자리잡고 있는 자리에는 국가통신망의 중추를 담당하는 KT 본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호조 남쪽편에 있는 크고 작은 관청들>

<기로소(耆老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문관으로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내고 70세가 넘아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국왕이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신하들과 함께 기로소에 들어간다. 기로소 건물에는 다른 관청과는 달리 국왕이 지나가는 박석을 깔아 놓은 어도(御道)가 설치되어 있다.  기로소 주변에도 많은 관청들이 자리잡고 있다.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

모형과 같은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영수각은(靈壽閣) 숙종이 기로소에 들 때, 왕이 직접 제목을 쓴 ‘어첩’을 보관하기 위해 기로소 옆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영수각친림도>는 영조가 기로소에 들면서 영수각에 친림하여 어첩에 제목을 쓰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오봉병과 서안을 그려 왕의 존재를 표현하였다. <기사경회첩>에 수록된 행사 그림은 <영수각친림도>, <숭정전진하전도>, <경현당선온도>,<사악선귀사도>, <본소사연도> 등 모두 5폭이다. 영조가 51세되던 해인 영조 20년(1744) 9월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기로대신들에게 친히 베푼 연회 등 행사장면을 그린 그림과 참석한 기로신의 초상화를 함께 수록하여 제작한 화첩이다. 왕의 기로소 입소는 충효사상에 기반하여 왕권을 재확인하고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영조는 자신이 추진한 사업을 주제로 다양한 기념 계첩과 계병을 제작하여 자신의 통치를 선양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장치로 활용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기로소가 있던 곳>

기로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관청 건물들이 밀집해 있던 자리에는 지금은 교보빌딩이 들어서 있다.

<기로소 주변>

<최근 모습>

기로소 주변 관청 뒷편 골목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다. 최근에 도심을 재개발하면서 육조거리 동쪽편을 흐르던 작은 개천인 열천을 복원해 놓고 있다.

<육조거리 동쪽 건물들>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 등의 관아가 있다.

<예조가 있던 곳>

광화문 대로 의정부 맞은 편에는 예조(禮曹)가 자리잡고 있었다. 예조, 의례.교육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 ‘문화부’, ‘교육부’, ‘외교부’에 해당한다. 국가적인 의례와 음악, 제사의 시행, 학교와 과거의 운영, 외교 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예조는 종묘제례를 비롯하여 국가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으로 행사연습을 위한 공간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조의 업무를 기록한 책, 춘관통고春官通考, 1788년(정조12)>

예조禮曹 소관의 업무 전반을 서술한 책으로 조선 초기부터 정조 초기에 이르는 전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1474년의 종묘의 모습은 <원의종묘原儀宗廟>에, 1667~1726년 증축 이후의 모습은 <속의종묘續儀宗廟>.<속의영녕전續儀永寧殿>에, 1788년의 종묘는 <금의종묘영녕전전도今儀宗廟永寧殿全圖>에 묘사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삼군부 청사>

현 정부종합청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원래 예조가 있었으나,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예조가 있었던 자리에 무반을 상징하면서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오늘날 합참본부에 해당하는 삼군부 청사를 세웠다. 이때 예조는 한성부가 있던 자리로 옮기고 한성부는 경희궁 동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삼군부 청헌당>

육조거리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관청 건물로 1967년 이곳에 정부종합청사가 세워지면서 육사 교정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예조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정부종합청사>

이곳에는 옛 관아건물로 삼군부 총무당과 청헌당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중추부(中樞府)>

문무 당상관(堂上官)이면서 소임이 없는 이들에게 명예직을 주어 대우하는 관청이다. 본래 이 관청은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최고의 군사기구였으나 뒤에는 고위 관료들을 예우하는 기관으로 변하였다. 실무 관헌들이 없는 기관이라서 그런지 부속 건물들이 거의 없다.

<사헌부(司憲府)>

언론 및 감찰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오늘날 ‘감사원’과 유사한 관청이다. 국왕에 대해 간언하고, 관원들을 감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사헌부와 중추부가 있던 곳>

<병조(兵曹)>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무관의 인사를 비록하여 국방과 군사의 제반 사항, 봉수, 역참 등을 담당하였다. 군부를 통제하는 기관답게 다른 관청에 비해 건물의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홍치년간 이훈 고신, 1501년>

이 문서를 작성한 문씨 성을 가진 사람의 서명이 남아 있어 당시 서리의 업무형태를 알 수 있다.

1501년 12월 27일 병조에서 발급한 인사 문서로서 이훈의 품계를 문순부위(종7품)에서 병절교위로 올린다는 내용이다. 이 문서의 중간 하단부에 <書吏 臣 文 (서명) > 부분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당시 병조에 소속된 문씨 성을 가진 서리가 이 문서를 작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선전기 인사문서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기재 방식이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형조(刑曹)>

법률.사법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 ‘법무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범죄의 조사 및 처벌, 소송, 노비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이관요처, 19세기>

실무적인 문서작성 용례이다.

조선후기에 작성된 필사본 자료로서 형조소속 이관, 즉 하급 관원들의 실무에 필요한 문서작성 용례들이 수록되어 있다. 초기, 계 등의 보고문서, 공사, 관 등의 업무협조 및 통보문서, 조인 심문문서 등의 다양한 용례가 사례별로 기재되어 있다.<출처:서울역사박물관>

<공조>

공조(工曹), 국토의 관리나 공사, 공예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난 ‘국토해양부’에 해당하는 관청이다. 산림의 관리, 치수, 건축, 토목, 그리고 수공예 등을 담당하였다.

<병조, 형조, 공조가 있던 곳>

병조, 형조, 공조가 있었던 자리에는 해방이후에도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970년대 문화공간인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다.

<공조 남쪽편 관청 건물들>

<공조 남쪽편>

작은 관청 건물들은 대부분 개인소유의 상업건물로 바뀌었다.

<광화문 광장 서쪽편 세종문화회관 주변>

관아 뒷편으로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실제 모습>

청계천 개울이 흐르던 곳으로 지금도 골목이 남아 있다.

<왕의 행렬>

조선시대 국왕은 사직과 종묘의 제사, 왕릉으로의 행차, 군대의 사열, 사냥 등의 일이 있을 때에 궁궐밖으로 행차하였다.  국왕의 출궁 행렬은 위엄과 권위를 갖추어 이루어졌다. 백성들에게는 임금의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또한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의 기회로도 이용되었다. 국왕의 행렬에 참가하는 관료와 군사는 560여 명으로 구성하였다. 중앙에는 국왕이 관료와 시위군들의 호위속에 어마를 타고 있다. 행렬의 맨 뒤쪽인 광화문 앞에는 왕세자가 몇몇 신하들과 함께 국왕을 배웅하고 있으며, 행렬의 앞쪽에서는 갑자기 징을 들고 나와 격쟁하는 백성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왕의 행렬이 이어지던 광화문 광장과 대로>

<금오좌목, 1750년>

서울에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조선시대 관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종각 앞 사거리 SC은행 본점 자리에 의금부가 있었다고 한다.

1750년 4월 의금부에 모였던 도사 10인의 명단과 이들이 의금부 건물에서 회동한 모습을 기록한 그림. 의금부는 중부 견평방(현재의 종로 제일은행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의금부 관아의 배치상태 및 중앙의 마루에 채응일을 비롯한 도사 10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관아의 주위에는 수양버들을 심었고, 관아의 뒤로는 연못이 보인다. 좌목에는 직책, 성명, 호, 출생연도, 사마시에 합격한 해, 본관을 적었다. <출처:규장각>

<의금부가 있던 곳>

의금부에 있던 자리에 들어서 SC은행(옛 제일은행). 구한말 이후 일제강점기에 은행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계회도>

1629년 6월 5일 남대문 밖 근처에 있는 홍성주의 집에 모여 만개한 연꽃을 감상하며 70세 이상된 기로들의 모임을 그린 계회도이다. 이 작품은 기로회 장면과 함께 글과 좌목으로 꾸며졌으며 가장자리에 예조참판 이경직의 서문이 쓰여 있는데, 같은 내용의 그림을 옮긴 후대의 모사본이다. <출처:고려대박물관>

국가의 중추, 육조거리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대로를 육조거리라고 하였다. 이 거리의 동편에는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기로소가, 서편에는 예조.사헌부.병조.형조.공조가 늘어서 있었다. 이들은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의 뼈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주변으로 실무관청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관청들은 궁궐 안에서 임금을 보필하는 궐내각사에 견주어 궐외각사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고종 초년까지 경복궁이 비어 있는 기간에도 육조거리는 한양의 대표적인 관청가로 관원들이 등청하고 퇴청하는 길이요, 예궐하고 퇴궐하는 길이었다. 이 거리는 임금의 명령이 나가고 백성들의 소원이 들어오는 통로로 임금과 백성이 만나는 접점이요, 백성들의 여론이 모이고 퍼지는 분주한 광장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