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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박물관] 화성의 축성과 도시의 건설

수원화성(사적3호)은 정조가 융건릉이 있는 화성부근에 수원부 읍치를 옮기면서 대규모로 쌓은 성곽으로 한양도성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은 읍성이다. 성곽은 서쪽 팔달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낮은 구릉을 연결하여 쌓은 둘레 약5.7km의 읍성이다. 정조18년(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만에 완공하였다. 수원화성의 건설에는 당대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과 유형원 등이 참여했으며, 거중기를 비롯한 다양한 신기술이 적용되었다. 화성은 한양도성을 비롯한 조선시대 읍치에 축성된 대부분은 읍성들과는 달리 우리나라 성곽의 특징과 일본이나 중국 읍성의 장점을 반영하여 쌓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읍성 중 하나이다. 또한 성곽을 축성하는 과정을 계획단계부터 도시의 형성까지 『화성성역의궤』에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다. 비록 한국전쟁 등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옛 기록을 충실히 반영하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고, 축성과정의 기록 또한 높은 평가를 받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수원화성은 성곽의 축성뿐만 아니라 자급자족이 가능한 조선 제2의 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많은 고려를 하였다. 화성내에는 수원부 관아와 국왕이 머물수 있는 처소역할을 할 수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행궁을 건설하였다. 또한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한 장점을 살려 수도인 한양과 마찬가지로 물자가 거래될 수 있는 시전을 읍치에 건설하여 상업활동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수원화성에는 한양 남부지방의 방어능력을 방어하기 위해 외장용을 설치하여 약 1만여명의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식량의 자급을 위해 토지를 개간하여 둔전을 운영하였다. 화성 건설이 완성된 이후 수원은 종2품 유수(留守)를 장관으로 두는 수원부(水原府)로 성격되었으며, 정조 사후에 군사조직인 외장용영이 폐지되기는 했지만 상업기능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화성의 축성과정과 정조대에 건설한 수원부 읍치의 모습을 모형과 관련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수원화성을 그린 그림.

서울와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남북도로를 중심축으로 팔달산 동쪽편에 읍성을 쌓고 있다. 둘레 5,743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읍성이다.

이것이 화성이다.
화성은 조선성곽과 이웃나라 성곽이 지닌 장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설물을 고안한 성곽 건축의 결정체다. 화성은 삼국시대 이래 우리 성곽 문화가 지닌 우수성을 바탕으로 중국 및 일본 성곽의 장점을 결합하여 만든 성이다. 각각의 시설물은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특히 지형과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도 않으며, 꼭 있어야 할 자리에 해당 기능을 가진 시설물을 배치한 데에는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또한 화성에는 정조의 애민정신이 깃들여 있다. 정조는 지나치게 춥거나 더울 때는 공사를 중지하고, 기존의 설계를 바꿔가면서까지 민가의 훼손을 최소로 줄였다. 화성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려 한 정조의 의지가 담긴 새로운 개념의 성곽이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십자로 생성
조선초기 중앙 도시는 남향의 관청과 그 앞에 T자 형태의 도로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화성의 관청은 동향이고, 도로도 남북 방향을 주 도로로 하는 +자 형태의 길을 생성하였다. 이는 지형을 고려한 것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뻗어 나오는 도로와 연결하여 상업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교통의 중심지로 조성하려 하는 의도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화성>

중앙에 행궁을 배치하고 남북 방향의 주요 도로에 동서 방향의 간선도로를 +자 형태로 만든 모습이다.

<낙안군>

중앙의 관청을 중심으로 동서로 난 T자 형태의 길을 만든 전형적인 도시의 모습

수원화성 축성공사
지금은 화성 성곽 중 대표적인 방어시설인 동북노대를 만드는 모습이다. 성곽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바닥을 다지고, 물을 뿌려가며 모래와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두들겨 다지는 것을 되풀이 해서 쌓아 올렸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 축성 공사.

수원화성은 한국, 중국, 일본의 성곽 축성법을 연구하여 장점을 취한 읍성으로 기존의 성곽축성에 비해서 진일보한 면이 있다.

축성공사 장비들

날가래, 기초공사를 할 때 흙 등을 퍼 넣거나 옮기는 도구, 쇠가래, 날이 전부 쇠로 되어 있는 가래. 가래는 흙을 떠서 던지는 삽 모양의 농기구이다. 정, 청태목을 이용 정을 고정해서 돌을 가공하는 데 사용한 도구, 쇠지렛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각종 물건들을 움직이거나 힘을 주는 곳에 사용된 도구, 보습, 쟁기 등에 사용하는 쇳조각으로 된 삽모양의 연장. 담기, 간단한 석재나 물건을 두사람이 나를 수 있도록 나무 손잡이에 쇠가죽을 꽈서 만든 들것.

석재의 이동경로,

화성축성에 필요한 석재가 팔달산, 여기산, 숙지산으로부터 화성으로 유입되고 있다.

석재의 조달방식,

정해진 규격에 따른 가격으로 석수에게 돈을 지급, 팔달산(13,900덩어리), 숙지산(81,100덩어리),여기산(62,400덩어리), 석록산과 아어산(30,200덩어리).

벽돌의 이동경로,

화성축성에 필요한 벽돌이 광주 왕륜동 가마, 서봉동 가마, 북성밖 가마로부터 만들어져 화성으로 유입되고 있다.

기와 및 벽돌 조달방식,

종류에 따라 단가를 정하고 수량에 따라 장인에게 돈을 지급.
.기와: 광주 왕륜동, 서봉동 가마 – 26여 눌 (2만 7천여 개)
.벽돌: 광주 왕륜동(618여 눌, 61만8천여 개), 북성밖 가마(37여 눌, 3만 7천여 개), 서봉동 가마(39여 눌, 3만9천여 개)

목재의 이동경로,

화성축성에 필요한 목재가 전국 각지로부터 해로를 따라 구포항을 통해 화성으로 유입되고 있다.

목재 조달 방식, 나라의 산림에서 직접 벌채하거나 민간 목재상에게 구입, 조달장소: 충청도 안면도, 황해도 장산곶과 봉산, 강원도 양주와 금와, 전라도, 민간상

풍납토성,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토성이다. 잔돌 하나 없이 고운 흙을 판축하여 18m 높이의 성벽을 쌓았고 성밖에는 해자를 만들어 방어를 더욱 튼튼히 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삼년산성, 

신라 자비왕 13년인 470년 충청북도 보은에 축조된 대표적인 석성이다. 주변지형과 더불어 13m나 되는 성벽은 한층은 가로로 다음 한 층은 세로로 쌓아 견고하게 만들어져 난공불락의 성이 되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강화외성,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1233년부터 내성을 쌓았고, 외성은 1237년 흙으로 쌓았다. 1677년 병자호란이 끝난 뒤 안쪽은 흙으로 바깥쪽은 돌로 개축하였으나, 비가 오면 흘러 내려 강화 유수 김시환의 건의로 1742년부터 2년 동안 벽돌로 다시 쌓았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유럽 최고의 요새 크로보리성,덴마크 헬싱쾨르, 16~18세기,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크론보리성은 화포공격에 대히바여 화성처럼 성벽 안쪽으로 흙을 채운 내탁 방식에 망루 등의 방어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낮지만 별 모양처럼 빗겨 세워져 있어 포탄을 피하기에 용이한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벽돌쌓기의 진수 평요고성, 중국 산서성, 14~15세기,

평요고성은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26차례의 증축을 거치면서 벽돌로 쌓은 성곽이 되었다. 이 성은 화성처럼 성 안에 사람들이 사는 읍성으로, 지금도 관청, 사당 등의 옛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들여쌓기의 진수 히메지성,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 14~17세기,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화성처럼 ‘규형쌓기-지반에서 중간 부분까지는 들여 쌓다가 위로 갈수록 바깥으로 내어 쌓는 방식’을 하여 성벽을 일자로 쌓았을 때 무너지기 쉬운 문제를 해결하였다. 조선에서는 함경도 경성의 읍성이 대표적인 규형쌓기였다. 이 모형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히메지성의 천수각 부분이다. < 출처:수원화성박물관>

궐리지(闕里誌),

19세기 중반 이후, 공자의 유지(遺址)와 선조 및 후손과 제자 등으이 내력, 공자묘와 공자에 대한 제사 등을 정리한 책.

궐리지 목판, 19세기 중반 이후,

공자가 살았던 곳, 그의 선조 및 후손과 제자 등의 내력, 공자묘와 공자에 대한 제사 등의 내용을 책으로 간행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이다.


화성부 준호구 (華城釜 准戶口), 1801년,

1798년 호적대장에 근거해 공이향면 매안리에 거주하는 전 좌승지 이서조에게 발급해준 문서.

경기충청지도,

1789년 신읍지 조성후에 그려진 지도, 1794년 만든 금천로는 표시되었지만 1796년에 만든 화성은 보이지 않는다.

동장대 상량문 탁본,

1795년, 정조의 명으로 1795년 8월10일 규장각 직제학인 이만수가 짓고 쓴 동장대 상량문의 탁본이다.

화성중기(華城重記),

화성 관리들이 사무를 인계할 때 전하는 장부, 각 건물 및 창고 현황과 그 안에 배치한 기물의 종류와 수량 등을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輿地圖), 19세기 이후,

조선후기 제작된 대표적인 목판본 지도책. 수원이 개성.강화.광주와 더불어 유수부로 표시되어 있다.

화성봉수당갱재축,

1795년 윤2월 화성의 봉수당에서 거행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정조와 신하들이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이어 지은 시들을 모은 책이다.

수원 팔달문 성곽 입구문 취훼 보수공사 설계도, 일제강점기.

팔달문과 관련된 설계도면이다. 수원화성과 관련해서 일제강점기의 도면이 매우 드문 현실에서 보수의 경위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도면이다. 1913년 팔달문 옹성의 호예를 훼철한 이후 실시한 보수공사 도면으로 보인다.

수원 화홍문 기타 복구공사 설계도, 1923년,

화홍문과 관련 시설의 복구를 위해 1923년 제작된 설계도이다. 문루의 측벽 벽돌 문양을 비롯하여 수문 앞쪽의 바닥에 깐 석재의 패터이 현재와 매우 다르게 되어 있다. 입면, 단면을 비롯하여 부분 상세도 등 다양한 도면을 한장에 짜임새 있게 그려 넣었다.

팔달문 상량문 탁본,

1794년, 정조의 명으로 1794년 8월25일 판중추부사인 이명식이 짓고 개성부유수인 이면웅이 쓴 팔달문 상량문의 탁본이다.

국왕, 행궁에 머물다.
행궁은 휴양, 피난, 능행(陵幸) 등을 위해 국왕이 왕궁을 나왔을 때 임시로 생활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화성행궁을 비롯하여 10여개의 행궁이 있었다. 정조는 1789년 이후 매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현륭원)을 찾을 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처음 화성행궁은 1790년에 340칸으로 완성되었으나 화성 축성 과정에서 대대적인 증축을 하여 576칸으로 확대되었다. 화성행궁은 국왕이 항상 머무는 정궁인 창덕궁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철저하게 정궁의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정조가 1804년 국왕의 지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화성행궁에 거처하고자 이를 대비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의 정문 이름은 신풍루(新豊樓)로 정조 자신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화성행궁의 중심건물은 봉수당으로 어머니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국왕의 행차 시에 사용했던 행사용 건물인 낙남헌에서는 화성의 백성들을 위한 과거 시험과 양로연 행사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렸다. 낙남헌 앞 담장은 높이 세우지 않고 열어 놓아 언제든 백성들이 찾아와 국왕에게 억울한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하였다. 화성행궁은 배치나 규모에 비해 일반 관청 장식에 준하는 소박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화성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검소한 생활과 항상 백성들을 생각하는 정조의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온양행궁(조선초기),

국왕이 신병치료를 위해 온양온천을 찾았을 때 거처하기 위해 세운 행궁이다.

광주행궁(1624년, 인조2),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에 마련한 행궁이다.

강화행궁(1631년, 인조9),

병자호란에 대비하여 대몽항쟁기를 참조하여 강화부 관아에 마련한 행궁이다.

양주행궁(1711년, 숙종37),

숙종대 한양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산성을 크게 쌓으면서 지은 행궁이다.


수원 화성행궁.

정조가 사도세자 현륭원을 참배할 때 머물기 위해 수원부 관아에 조성한 행궁이다. 실제로는 정조가 왕위를 순조에 양위한 후 상왕(上王)으로 머물기 위해 지은 이궁(離宮)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행궁에 비해서 규모가 크고, 궁궐로서 격식을 갖추고 있다.

수원화성 행궁 모형

용두, 

화성행궁에서 출토된 용두, 건물의 용마루 아래 내림마루에 설치한 용머리 모양의 장식물이다.

취두,

화성행궁에서 출토된 취두.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에 설치한 매의 머리 모양의 장식물로, 건물의 위엄과 형태를 풍부하게 한다.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6호였는데, 지금은 1천여 호나 되는 인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년이 안되어 아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다.” 1794년 1월15일 화성 축성 현장을 찾은 정조의 말이다. (정조실록 권39, 18년 1월15일)

대도시로 성장하다.
수원은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농업은 물론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일거리를 찾아 유입되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여 서울에 버금가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유수부로 승격 –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화성
수원은 1793년 명칭이 화성으로 바뀌면서 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면서 서울에 버금가는 도시로 커졌다. 화성에 10만 호(50만명)를 건설하라는 정조의 지시에 따라 화성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수원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에게는 10년 동안의 세금과 기존에 국가에서 빌린 환곡도 없애 주었다. 또한 수원과 인근 5읍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1년에 한 차례씩 과거 시험을 보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수원으로 모여들고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둔전과 시전 – 농업과 상업이 발전하는 화성
또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농사지을 땅을 개간하였다. 이 땅을 중심으로 토지없는 백성들이 모여들고 새로운 농업 개발로 농업이 활성화 되었다.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시전을 만들어 전국의 주요 상인들을 유치하고 수원지역의 상인들이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장용외영의 설치 – 안 밖으로 건실해지는 화성
장용영외영의 설치로 약 5천여 명의 군사들이 화성에 주둔하게 되자 무예 이론 교육 기관인 강무당을 활성화시키고 연무대에서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또한 화성행궁의 부속시설물로 외정리소와 분봉상시를 만들어 국왕의 행차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처럼 화성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와 더불어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였고 정조 사후에도 그 지위와 역할은 계속되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화성 시전 – 조선의 상업 중심지로 태어나다.
정조시대에는 상업을 천대시하던 생각에서 벗어나 장사와 유통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식이 확대 되었다. 조선 전체의 상업을 발전시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했던 정조는 교통의 요진 화성 신도시에 한성부와 유사한 시전을 설치하여 조선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시키고 새로운 상업 정책을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수원 화성행궁 맞은편에 설치되었던 시전(市廛 ).

한양의 육의전(六矣廛)을 모델로 신도시 수원읍치의 상업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시전이 열리다.
시전은 성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상용품을 파는 시장의 역할과 관청에서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18세기 말 새롭게 이전된 수원 읍내에도 신풍루 앞 대로 좌우에 입색전(비단을 파는 상점), 어물전(생선과 과일을 파는 상점), 목포전(무명 모시 목화를 파는 상점), 상전(소금과 일용 잡화를 파는 상점), 미곡전(잡곡과 백미, 담배와 국수를 파는 상점), 지혜전(종이류와 신발을 파는 상점), 관곽전(관과 관을 담는 궤인 곽을 파는 상점), 유철전(놋쇠와 쇠를 다루는 상점)이 있었다. 도시 중심부에 상점이 늘어서는 경향은 서울을 비롯한 18세기 지방 대도시의 중요한 변화로, 장안문에서 팔달문에 이르는 가로변에 기와집 상덤들이 처마를 잇대고 계속 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조가 추구한 대로 왕성한 상업 도시의 면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수원의 상업발전 정책
좌의정 채제공은 수원의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국에서 부호들을 모아 수원에 시전을 짓고 장사를 하고자 건의하였다. 그리고 수원과 인근 지역에 5일장을 설치하여 신도시를 중심으로 장시를 상설화하고 세금을 거두지 말게 하여 도시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자 해남 지역에 있는 윤선도의 후예들이 수원으로 올라와 상업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790년(정조14) 5월 수원부사 조심태는 보다 구체적인 상업 진흥책을 제시했다. 그는 수원 지역 인물 중 여유 있고 장사를 잘 아는 자를 택해서 자본금을 주고 장사를 하게 하여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돈 65,000냥을 조달하여 수원 상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신도시가 만들어진 지 불과 2,3년만에 전국 최고의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결과 화성에는 성내 시장과 성외 시장이 만들어져 새로운 상업발전의 모델이 되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시전(市廛 ), 

신도시 화성에 화성축성과 함께 길을 새로이 정비하여, 중앙에는 교차로인 ‘십자로’가 생성되었다. 남쪽으로 팔달문, 북쪽으로 장안문, 서쪽으로 행궁, 동쪽으로 창룡문이 연결된다. 독점상인인 시전은 십자로 주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여 수도권 상업 유통의 중심을 이루었다.

1.상전-소금 및 일용잡화를 파는 곳

2.입색전-비단을 파는 곳

3.어물전-생선을 파는곳

4.유철전-놋쇠로 만들어진 물건을 파는 곳

5.선술집-서서 마시는 술집

1.약방-약을 조제하고 재료를 팔기도 하는 곳

2.미곡전-잡곡,담배,국수를 파는곳

3.지전-종이를 파는 곳

4.혜전-신발을 파는곳

5.관곽전-관을 만드는 곳

 

농업기술의 새로운 무대
수원을 자급적인 경제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농업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토지를 개간하는 일이 중요했다. 정조는 화성 일대에 만석거를 비롯한 저수지와 국영 농장인 둔전(屯田)을 만들어 안정적인 농업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토지 없는 백성들은 둔전을 경작하여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한편, 이들이 수확한 양곡으로 화성에 주둔한 장용외영 군사들의 군량미와 급여를 확보하게 하였다. 또한 저수지와 수차를 이용한 농업 개발과 이앙법의 대대적인 실시로 생산량을 크게 향상시켜 수원을 농업의 선진도시로 발전시켰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병농을 병행하는 제도 – 둔전
정조는 둔전(屯田)이 병농을 병행하는 선왕의 제도에 가장 가까운 방안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장용영의 향군(鄕軍)이 봄, 여름에 이를 경작하고 가울, 겨울에는 훈련과 수확을 병행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와 같은 둔전의 설치와 경영에 대한 정조의 관심은 대유둔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1794년(정조18)에 전국이 극심한 흉년의 피해를 입자, 정조는 화성 성역을 잠시 중단하고 화성의 장안문 밖을 개간하라는 윤음(綸音)을 공포하였다. 당장 식량이 급한 백성들에게는 화성 성역보다도 풍족한 수확을 위한 농경 시설의 확충이 더 중요하다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여러 달의 공사를 통해 1795년(정조19) 11월에 완성된 대유둔전은 개간을 통해 얻은 경작지와 매입한 일반 민전(民田)으로 구성되었다. 비용은 원행(園行) 준비금의 일부와 관동곡(關東穀)의 일부로 마련한 2만냥으로, 이중 1만냥은 민전매입에 사용되었다. 또한 백성들이 공사에 의욕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일한 양에 따라 임금을 차등지급하였다. 이로써 109석 14두락(마지기)의 둔전이 완성되었고, 1795년 가을 766석을 수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만석거와 둔전,

수원 북쪽에 만들어진 만석거와 둔전의 모습이다. 농부가 만석거에 있는 수갑을 통해 들어온 물을 무자위를 이용하여 논으로 끌어들여 모내기를 하고 있다.

수원화성을 건설하면서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서 건설한 대표적인 저수지

만석거(萬石渠), 1795년(정조19) 수원 화성을 쌓으면서 함께 조성한 대유둔전에 제공할 물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이다.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쌀을 1만석이나 더 생산하였다고 해서 만석거(萬石渠)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일왕저수지 또는 교귀정방죽이라고 부른다. 교귀정이라는 이름은 저수지 남쪽에 교귀정(交龜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만년제(萬年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기슭으로 옮기면서 왕릉의 면모를 갖춘 현륭원(顯隆園)으로 새롭게 단장하도록 하였다. 그 후 현륭원 일대에서는 주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둔전(屯田) 설치, 화산 일대의 대규모 조림(造林), 농업 용수 확보를 위한 제방 축조 등의 사업이 수년에 걸쳐 추진되었다. 이때 축조된 저수지가 만년제(萬年堤)로 1798년(정조22)에 완성되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축만제(祝萬堤), 화서문 서쪽 지역의 농업 활성화를 위해 만든 저수지이다. 여기산 아래의 평지에 만들었으며, 제방 아래로 축만둔(祝萬屯) 혹은 서둔(西屯)이라고 불리는 국영 농장을 만들어 농업 생산량의 증대를 꾀하였다. 수원 화성의 북쪽에 북호(北胡)가 있기 때문에 서로라고도 불리며, 낙조(落照)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행사를 널리 알리고 다양한 놀이를 마련, 모두가 함께 즐기도록 하라.”

낙성연, 다함께 화성행궁 완공을 축하하다.
1794년 1월7일 화성 축성을 시작한 이래 3년의 시간이 흐른 1796년 9월10일 마침내 공사가 끝났다. 이날 정조는 매우 감격하여 화성 축성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다. 또한 축성을 기념하고자 10월16일 참여한 모든 사람들과 화성의 백성들을 모아 행궁의 낙남헌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낙남헌에 대형 차일을 치고 중앙에 화성 축성 총리대신인 체제공과 수원 부사인 조심태가 자리하고, 대형 단에는 공사 감독관들이 자리했다. 아래 넓은 마당에는 화성의 선비들, 백성들, 인근 승려들도 참가했다. 낙남헌의 위 무대에서는 서울과 수원 무희들의 궁중 무용이, 아래 마당에서는 광대들의 사자놀이와 산대회가 펼쳐졌다. 이렇듯 화성 낙성연은 단순한 축성 축하 잔치가 아니라, 축성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화성의 희망찬 미래를 축원하는 잔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정조가 낙성연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는?
갑자기 궁중에 홍역이 돌아 9월22일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가 홍역에 걸리자 정조는 원자를 데리고 규장각 옆 ‘이문원’으로 피신을 갔다. 행여 원자가 홍역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고자 하는 계획과 정조 자신이 상왕이 돼 화성으로 내려가겠다는 계획이 실현 불가능하게 되므로 정조는 낙성연 참여를 포기하였다. <수원화성박물관>

낙성연,

1796년 10월16일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화성의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모아 축하잔치가 열렸다. 공사에 참여했던 모슨 사람들을 위해 음식과 춤, 음악이 있어 매우 흥겨운 모습이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화성기적비(華城紀跡碑)

화성 축성의 전반적인 과정이 기록된 비석으로 정조의 왕명에 따라 1797년 1월 김종수가 작성하였다. 정조가 화성 축성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정조의 위민 정신과 개혁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당시의 비석은 전해지지 않고 그 내용만이 화성성역의궤에 남아 있는데 의궤내용을 바탕으로 장안문 서쪽에 기적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