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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특별전,”종묘”] 신실, 역대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공간

종묘(宗廟)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보시는 공간으로 유교가 국가이념이었던 조선 사회에서는 왕실의 근본이자 정통성의 기반이었다. 유교사회에 ‘예(禮)’는 사회질서와 국가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것으로 조선사회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조선은 ‘예’를 구현하는 의례로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의 5가지를 오례라 하여 법과 통치이념으로 규정하였다. 그 중 ‘길례(吉禮)’는 종묘와 사직에 제를 올리는 것으로 가장 중시된 의례였다. 종묘대제는 종묘에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례로, 봄.여름.가을.겨울.납일 등 1년에 5번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매년 5월 첫번째 일요일에 국제문화행사로 봉행되고 있다. 제향의식 뿐 아니라 제례악과 일무 등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종묘 정전>

종묘에는 역대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공간으로 정전과 영녕전을 두고 있다. 정전에는 태조와 현직 국왕의 4대조, 불천위에 해당하는 국왕에 해당하는 19명의 왕과 왕비들을 모셨으며,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 정전에서 옮겨온 왕, 추존된 왕을 포함한 16명의 왕과 왕비들을 모시고 있다. 이에 따라 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신실은 정전에 19실, 영녕전에 16실이 있다. 신실에는 국왕과 왕비의 신위 외에도 책(冊)과 보(寶), 교명(校名), 국조보감(國朝寶鑑)이 함께 봉안되었다. 신실 중앙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신주장이 있고 좌.우에 책과 보를 보관하는 책장과 보장이 배치되어 있다. 신주장 앞에 종묘제례 때 신주를 옮겨모시는 신탑과 그 위에 궤가 있다.

<종묘 정전 신실>

<종묘 향대청 건물 내부에 재현해 놓은 종묘 신실 1칸>

신실(神室)의 봉안물(奉安物), 책(冊)과 보(寶)
종묘에 시주가 부묘될 때, 해당 왕과 왕비의 도장인 보인(寶印), 이들이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담은 책(冊), 책봉할 때 내리는 일명장인 교명(校命), 왕의 통치 행위 중 모범이 될 만한 사례들을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國朝寶鑑)』이 함께 봉안되었다. 신실 내부의 신주장(神主欌)을 중심으로 동쪽의 장에는 보인, 서쪽의 장에는 책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후대로 갈수록 올려지는 책보의 수가 많아지면서 기존의 장위에 가장(架欌)을 얹기도 했다. 책보는 종묘 정전의 남쪽 신문(神門)을 통해 들어와 서쪽 계단 아래의 책과 보를 놓는 자리(책보위冊寶位)에 동쪽을 향해 놓였다가 신실의 책보장에 봉안되었다. 이때 책보위에는 모란 병풍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책과 보를 올리는 배안상이 차려졌다. 이렇게 봉안된 보인과 책은 종묘를 관리하던 기구인 종묘서(宗廟署)에서 정기적으로 관리했으며, 국왕이 직접 살피는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모란도 병풍과 배안상(拜案床)>

 선대 왕과 왕비의 보와 책을 신실에 봉안하는 의례를 행하기 전 보가 담긴 함과 책이 담긴 함을 배안상 위에 올려두고 그 뒤로 모란병풍을 펼쳤다.


<종묘에 봉안된 책과 보인에 대해 기록한 책, 종묘등록서(宗廟謄錄序)>

1705(숙종31)~1789(정조13) 이후 추정, 1705년 종묘 정전과 영녕전의 책과 보인을 수리한 현황에 대한 기록부터 1789년까지의 변화를 수록한 책이다. 왕대별로 종묘 각 실에 봉안되었던 책과 보인의 제작연대, 수량 등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조실의 책장과 보장>

<정조의 업적을 기록한 책>

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을 모아 편찬한 기록물이다. 세종 대에 계획되어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발행되었는데 1782년(정조6)부터 책보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기 시작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될 때 내려진 교명,  1759년(영조35)>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될 때 영조가 하사한 임명장이다.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의의와 지켜야 할 교훈, 부귀 장수를 축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뒷부분을 오색의 색동무늬 비단으로 배접했다. 교명은 서장(西欌)의 1층 첫 번째 단에 봉안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교명함>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될 때 내려진 죽책, 1759년(영조35)>

대나무 죽편 6개를 이어 6첩으로 만들어서 왕세손으로 지켜야 할 경계의 글과 교훈을 새겼다. 죽책을 담았던 함은 흑칠에 금니로 장식하고 장석에 문양을 섬세하게 새겼다. 죽책을 함에 담아 서장의 1층에 봉안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죽책함>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될 때 받은 옥인과 옥인함, 1759년(영조35)>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될 때 받은 옥인으로 인문은 ‘왕세손인(王世孫印)’을 새겼다. 옥인은 동장(東欌)의 1층에 위치했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조가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하사한 은인과 은인함. 1776년(영조52)>

영조가 83세 때에 왕세손이던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내린 은인이다. 영조의 친필로 ‘효손팔십삼서(孝孫八十三書)’를 새겼는데 정조는 이 은인을 소중하게 여겨 정사를 볼 때나 거동길에 항상 앞에다 두었다. 은인은 함께 내려진 유수(諭書)와 동장에 봉안되었다.

<책과 보인에 대한 기록, 책보록(冊寶錄), 1909년 이후>

종묘 각 실에 봉안된 역대 왕과 왕비의 책과 보인 등의 수량과 위치를 기록한 책이다. 가장 마지막에 ‘진종 소황제 기유죽책’이 기록되어 있어 진종을 황제로 추존하고 책보를 봉안한 1909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오례의 예법과 절차를 기록한 책, 국조오례의, 1474년(성종5)>

조선초기 신숙주.정척 등이 국가의 기본예식인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의 예제를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의 편찬은 세종의 명으로 시작되었으나 1474년(성종5)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이 책의 편찬으로 조선시대 의례와 관련된 기본 규칙이 정립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에서 치러지는 중요 행사 그림 병풍, 1866~1899년>

종묘 정전과 영녕전의 배치, 연중 종묘에서 행하는 여러 제례의식 및 제수와 제기의 배치를 각각 그림으로 그리고 그 아래에 관련된 내용을 글로 쓴 8폭의 병풍이다. 제례의식을 그려 병풍으로 제작하는 전통은 정조대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제례병풍은 제례 실무자가 평소에 그림을 통해 의식절차를 익힐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제작되었다. 본 병풍에 수록된 제례 의식은 정조 대에 개정된 내용이 대폭 반영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제1폭: <종묘전도宗廟全圖> 정전을 중심으로 전사청, 재궁, 집사청 권역의 건물 배치를 표현한 그림이다. 제2폭: <영녕전전도永寧殿全圖> 영녕전 및 부속 전사청을 부감법으로 그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제3폭: <오향친제친행성기성생의도> 오향친제에 앞서 왕이 친림하여 제기와 희생을 검사하는 성기례(省器禮)와 성생례(省牲禮)의 위치를 그린 그림이다. 제4폭:<속절삭망의도>,<천신의도>, 매월 삭망과 오속일五俗日에 올리는 제례와 제철 산물을 바치는 천신의薦新儀의 두 의례를 한 폭 안에 나누어 그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제5폭: <전알의도> 국왕이 봄가을에 종묘를 살피는 전알의를 그린 그림이다. 제6폭: <오향친제설찬도> 정전 각 신실의 상차림인 <설찬도說瓚圖>, 신실 앞 준소상에 배설되는 제기를 그린 <준소제기樽所祭器>, 희생을 잡고 조리는데 쓰이는 기구를 그린 <전사청기용典祀廳器用>을 세부분을 구획하여 각각 그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제7폭: <오향친제반차도> 국왕이 친림하는 오향친제 때 제관, 악공, 문.무반 관료 및 종친의 배치를 그린 반차도이다. 왕과 왕세자의 모습은 표현되지 않았다. 제8폭: <친상책보의도>, 선대왕의 추상존호追上尊號 때 왕이 친히 책보를 올리는 의례는 영조 대에 신설되었다. 책보는 정전 서쪽 계단 아래 악차 안에 모란 병풍을 배경으로 놓인 주칠상 위에 모셔져 있다. 왕과 왕세자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으나 제관의 위치로 보아 정전의 판위에서 대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 제향의 의식 절차
종묘 제향의 절차는 조선 초기에 큰 틀이 확립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약간의 수정.변화가 이루어졌다. 국왕이 직접 의식을 수행하는 친제親祭의 절차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취위(就位)>

왕과 제관이 제례를 위해 정해진 위치에 서는 의식이다.

1.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관례(晨祼禮), 향과 술로 혼백을 모셔오고 예물과 폐백을 바침>

축시 정가(새벽1시)에 초헌관(招獻官)인 왕과 제관이 입장하여 각자의 위치에 서면 제례가 시작된다. 왕은 향을 피우고 땅에 향기로운 술을 부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 신의 혼백을 신주로 모시는 의식을 행하였다. 신을 모신후에는 흰 모시를 폐백(幣帛)으로 바치고 희생의 간을 불에 태워 제사 준비가 충실하게 되었음을 신에게 알렸다. <출처:고궁박물관>

<향을 세번 사르는 초헌관과 울창주를 땅에 붓는 의식>

<향로와 향합>

향로는 향을 태운 연기로 천상의 혼을 내려 모시는 의식에 사용하는 제기이다. 신관례 때 초헌관은 향로에 향을 세번 나누어 사른다. 향을 담아두는 향합은 향로의 동쪽에 진설한다.

<울창주를 붓는 제기와 받침>

찬은 ‘용찬龍瓚’ 또는 ‘규찬圭瓚’이라고도 한다. 신관례에서 지하의 백(魄)이 술의 향내음을 따라 올라와 신주에 모셔질 수 있도록 찬에 울금향의 술(울창주鬱鬯酒)을 담아 신실 바닥에 뚫린 관지통灌地桶에 붓는다. 접시형의 받침대인 찬반과 한 쌍을 이룬다.

<폐를 담는 광주리>

 대나무를 잘게 쪼개서 엮은 광주리로 신위에 바치는 예물인 폐(幣)를 담는다. 신주 한 위당 한 필씩 담아 제상 중앙에 놓여졌다.

2.신이 즐기는 절차

<천조례(薦俎禮),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

궤식(饋食), 익힌 고기를 신에게 바치고 곡식을 태워 즐기시게 함. 신에게 익힌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 드리는 절차로 제의의 핵심이 되는 의식이다. 궤식에서는 전사청에서 삶은 소.양.돼지의 고기를 생갑(牲匣)에 담아 남신문(南神門)과 신의 길을 통해 각 신실로 운반하였다. 제관들은 생갑을 조(俎)에 받쳐 제상의 서쪽에 올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와 생갑을 운반하는 제관, 익힌 고기를 올리는 의식>

<희생을 올리는 상, 조(俎)>

소.양.돼지 등 희생을 올리는 데 사용한 네모난 소반 모양의 제기이다. 상판은 삼등분하여 양쪽 끝은 붉은 색, 가운데는 흑색칠을 하였다. 천조관(薦俎官)은 조를 받들어 남신문과 신의 길을 지나 신실로 입장해 제상의 서쪽에 올렸다. <출처:고궁박물관>

<곡식을 더는 수저, 서직비(黍稷匕)>

 메기장(서黍)과 찰기장(직稷)을 태우기 위해 조금씩 덜어낼 때 사용하는 수저이다. 손잡이 끝에 연꽃봉우리 모양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음각선으로 꽃무늬를 새겼다. <출처:고궁박물관>

<화로, 번간로(燔肝爐)>

희생의 간이나 서직(黍稷)을 태울 때 사용하는 화로이다. 간과 서직을 태우는 절차는 민간의 가례(家禮)에서는 찾을 수 없는 국가 제례의 독특한 의식으로 고대 주왕조의 번제(燔祭)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바닥면에 ‘임진조壬辰造’ 명문이 새겨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삼헌례三獻禮, 신에게 술을 세차례 올려 즐기시게 함. 술을 올라는 헌작(獻爵)은 국왕이 단술(예제醴齊)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왕세자가 탁주(앙제盎齊)를 올리는 아헌례(亞獻禮), 영의정이 청주(淸酒)를 올리는 종헌례(終獻禮)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초헌례 후에는 축문을 읽어 제사의 연유를 고했다. 종헌례때는 종묘에 부속된 배향공신(配享功臣)과 칠사(七祀)의 신위에도 한 잔의 청주를 올려 즐기게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첫술잔을 올리는 초헌례, 축문을 읽는 제관>

<초헌례, 국왕이 단술(예제醴齊)을 올린다.>

<아헌례, 왕세자가 탁주(앙제盎齊)를 올린다.>

<종헌례, 영의정이 청주(淸酒)를 올린다.>

종헌례때는 종묘에 부속된 배향공신(配享功臣)과 칠사(七祀)의 신위에도 한 잔의 청주를 올린다.

<술잔(작爵)과 술잔받침(점坫)>

 신에게 술을 올릴 때 사용하는 잔으로, 모양이 새(작雀)와 비슷하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종묘대제 등 큰 제사 때 매 신위마다 세 개의 작을 올리는데 각각 예제(醴齊), 앙제(盎齊), 청주(淸酒) 등을 담아 올린다. 점은 작을 받치는 판이다. 작의 바닥면과 점의 뒷면에 ‘임진조’명문이 각각 새겨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축문을 올려주는 판과 문진>

축판은 축문을 올려두는 나무판으로 검은 칠을 하였다. 축문이 바람에 날리지 않게 놋쇠로 된 문진으로 고정시켜 제상의 서편에 놓았다.

3. 신이 베푸는 절차

<복주를 받드는 초헌관, 망료례를 행하는 제관들>

<음복례飮福禮, 신이 드신 술과 고기를 내려 받아 복을 받음.>

신을 즐겁게 하는 의식을 마친 후 국왕이 신에게 올렸던 술과 익힌 고기를 받아 신이 베푸는 복을 받는 음복례가 행해졌다.

4. .신을 보내는 절차

철변두撤籩豆, 제상을 물림, 변과 두1개씩의 위치를 조금 옮기는 칠변두라는 의식으로 제상을 물렸음을 표현했다.

<송신사배送神四拜, 신을 보내는 예를 올림>

국왕과 제관들은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는 신을 위하여 네 번 절하는 예(송신사배)를 올렸다.

<망료례望燎禮, 축문과 폐백을 묻고 태워 제의를 마무리 함.>

신을 보낸 후에는 제례에 사용되었던 축문과 폐백을 묻고 태우는 망료례를 행하여 제례를 청결하게 마무리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축문과 폐를 태울 때 사용하는 그릇, 망료기(望燎器)>

 제례에 사용된 축문과 폐백은 제례가 끝나면 모아서 구덩이에 묻었다. 영조대부터 축문과 페백을 모아 불에 태우기 시작했는데 이 때 사용한 그릇과 젓가락이다.

<젓가락, 망료저(望燎箸)>

신실의 구성
종며 정전은 하나의 건물 안에 신실을 나누어 신주를 모시는 동당이실(同堂異室) 제도를 적용하여 19개의 신실에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모셨다. 신실 중앙에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신주장神主欌이 있고, 그 좌우로는 책장과 보장이 배치되어 있다. 신주장 앞에는 제례를 지낼 때 신주를 옮겨 모시는 신탑(神榻)이 있고, 그 위에 궤(几)가 있다. 신실 앞에는 노란 명주 천으로 만든 면장(面帳)이 드리워져 있고, 각 신실 사이에는 격렴을 내려 공간을 구성하였다. 제례를 지낼 때에는 신실 앞에 제상을 차리고 양쪽에 선(扇), 개(蓋) 등의 의장구를 세웠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신실(宗廟神室) 내부 구조, <종묘일간도>, 『종묘의궤』, 1706년(숙종32)>


<신실 칸마다 내리는 발, 격렴(隔簾)>

신실의 칸마다 좌우에 걸려있는 주렴으로 ‘간격주렴’이라고도 한다. 크기가 중간 크기여서 ‘중주렴’이라고도 하는데, 붉은 칠한 대나무발에 초록색 비단실로 귀갑문(龜甲文) 형태로 짰다. 세개씩 달려있는 낙영의 끝에는 하얀색 솜방울(면령綿鈴)을 달아 놓았다.
정조실 좌우에 내려진 발. <출처:고궁박물관>

<정조실 좌우에 내려진 발>

제향을 위한 음식 제수(祭需)
종묘 제향은 왕릉과 어진을 봉안한 진전(眞殿) 등에서 이루어진 제사와 제사 음식(제수祭需)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종묘 제향에는 소.양.돼지의 희생(犧牲)을 중심 제물로 바쳤다. 종묘제향은 희생을 바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혈식(血食)’의 제사로 간주되었다. 희생 외에도 종묘 제향에는 기장과 수수 등의 곡식, 땅과 물에서 난 다양한 산물 등이 골고루 올려졌다. 왕릉 등의 제사에서는 산자(散子), 다식(茶食) 등과 같이 밀가루를 꿀, 기름과 함께 반죽하고 기름에 지져 만든 의례용 음식인 밀과(蜜果)를 중심으로 제수를 준비하였다. 그 외에 떡과 과일, 국수 등을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 신실에 차려지는 제상(祭床)>

<종묘제사에 올리는 제상의 배치>

<제상에 오른는 제기들>

<종묘오향대제설찬도설(宗廟五享大祭設饌圖說,) 『종묘의궤』, 1706년>

<봉상시에 관해 정리한 책, 태상지(太常志),1873년(고종10)>

봉상시(奉常寺)의 내력.기구.업무 등을 정리한 책이다. 봉상시는 조선시대에 국가 제례 및 시호(諡號) 관련 업무를 담당한 관청이다. 권수(卷首)에는 종묘.사직 등 봉상시 관할의 제례공간, 제기, 상차림 등이 그림으로 도해되어 있으며 이어서 봉상시의 연혁, 관할 사전(祀典) 및 제의 각지에서 올린 진상품, 각종 제물의 조리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제수품을 마련하는 내용을 기록한 책, 사전사례편고(祀典事例便考), 1799년>

정조의 명에 따라 제수품 마련에 대한 내용을 종합하여 기록한 것으로 능(陵),원(園).묘(墓) 등의 제수 담당자에 대한 규정, 좋은 제수를 고르는 법, 술.떡.과자 등 제물의 조리법 등을 기록하고 각 제례의 상차림을 그림으로 그려 이해를 도왔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조대의 제례 변화를 기록한 의궤, 종묘의궤, 정종계축속록(正宗癸丑續錄), 1793년>

『종묘의궤宗廟儀軌』의 속편으로 정조 대에 변화.신설된 내용을 담고 있다. 정조는 국가 제례 때 건과, 과일, 젓갈, 절인 채소 등의 제물을 계절에 따라 바꾸어 쓸 수 있도록 한 새로운 규정을 마련했다. 이는 의궤에 ‘어정태상과과염저도식御定太常菓果鹽菹圖式’이라는 표로 일목요연하게 제시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포의 규젹을 재는 자, 유표(鍮標)>

 1783년(정조7) 제향에 사용하는 포(脯)에 대한 규격을 바로잡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 반포한 유표이다. ‘예기척禮器尺 길이 팔촌구푼(長八寸九分 너비 이촌(廣二村) 두께 오푼(厚五分)’이라고 새겨져 있다. 표의 도식인 신반유표도(新頒鍮標圖)가 정조대에 만들어진 『종묘의궤속록』에 수록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준소상(尊所床)
음식과 함께 술의 진헌은 신들에 대한 공경과 정성을 표현하는 제향의 핵심요소였다. 종묘제향의 준소상에는 여섯 개의 술항아리를 계절별로 종류를 달리하여 올렸다. 봄과 여름에는 계이鷄彝.조이鳥彛.상준象尊.희준犧尊.산뢰山罍가, 가을과 겨울에는 가이斝彛.황이黃彛.착준著尊.호준壺尊.산뢰가 사용되었다. 신에게 술을 세 번 바치는 삼헌례三獻禮를 행할 때, 용머리 장식을 한 국자인 용작龍勺으로 이들 술 항아리에서 술을 덜어 ‘작爵’에 따랐다. 준소상에는 정결하게 씻긴 ‘작’을 담은 바구니와 지하의 신인 백魄을 맞이하기 위해 울창주를 부을 때 사용한 용찬龍瓚을 함께 올렸다가 해당 의식이 진행될 때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제례에서 술을 따라 올리는 준소상>

봄, 여름 제사에 올리는 준소상을 보여 주고 있다.

<봄, 여름 제사 준소상의 구성>

<상준(象尊)과 산뢰(山罍)>

상준은 코끼리 모양을 하고 있는 술동이이고, 산뢰는 산그림이 새겨진 술동이이다.

<계이(鷄彝)와 희준(犧尊)>

계이는 닭그림이 그려진 술동이 이고, 희준은 소가 그려진 술동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