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고궁박물관특별전,”종묘”] 제향을 위한 준비 공간

조선시대 국가를 상징하는 제향 공간인 종묘(宗廟) 정전 동쪽에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 주로 배치되어 있다. 종묘에서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종묘 관리인들이 사용하는 수복방(守僕房), 국왕과 세자, 제관들이 목욕재개하는 재궁(齋宮), 향(香)과 축문(祝文)을 보관하는 향대청, 악공들이 대기하는 악공청(樂工廳)이 있다. 그 중 전사청과 수복방이 정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망묘루(望廟樓)와 함께 제일 먼저 만나는 공간인 향대청(香大廳)은 향(香).축문(祝文).폐백(幣帛)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향대청은 평상시 종묘에 소속된 관리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으로 마당이 있는 넓고 건물규모도 큰 편이다. 향대청을 지나면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에 해당하는 재궁(齋宮)이 있다. 향대청과는 달리 재궁은 제사를 주관하는 국왕과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어재실(御齋室), 세자재실(世子齋室), 어목욕실(御沐浴廳)로 구성되어 있다. 재궁을 지나면 어도(御道)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정전 동문 앞으로 연결된다. 동문 앞에는 제사에 사용될 음식을 준비하는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전사청, 제사에 사용될 물을 긷는 우물인 제정(祭井), 제례음식을 검사하는 찬막단(饌幕壇)과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검사하는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수복방은 정전 동쪽 담장에 지어진 작은 건물로 정전을 출입하는 작은 중문과 방들로 되어 있으며, 종묘를 관리하는 실무자들인 수복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정전과 영녕전 서쪽편에는 종묘제례를 진행하는 악공들이 대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악공청(樂工廳)이 각각 준비되어 있다.


곡식을 담는 함, 식함(食函),

소나무로 제작된 함으로 바깥쪽에 흑칠을 했다. 안에 곡식을 담고 뚜껑을 덮어서 사용했다.


전사청에서 사용한 제기,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 제6폭 <오향친제설찬도> 전사청 기용(器用)


시루, 증(甑),

떡이나 쌀을 찌는 용구이다. 내부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어 시루를 물솥에 올려두고 불을 때면 뜨거운 수증기가 구명을 통해 들어가 시루 안의 음식을 익혔다.

술병과 술의 용량을 재는 용기,

유이선(鍮耳鐥)은 제사에 사용되는 술의 양을 재는 도구로 주선(酒鐥)이라고도 한다. 주병 두 개 분량의 술이 이선에 들어갔다고 한다. 유주병(鍮酒甁)은 제사에 사용되는 술을 담는 병이다.

희생을 잡는 칼, 난도(鑾刀),

종묘에서 제사에 올릴 희생을 벨 때 사용한 철제 칼이다. 칼 끝고 손잡이 부분의 고리에 총 다섯 개의 방울을 달았다. 난도의 다섯방울은 오행을 따른 고대의 다섯음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을 내어 자연의 조화를 상징한다.

난도에 대한 설명

액체의 용량을 재는 되, 유승(鍮升),

기름과 꿀과 같은 액체의 용량을 재는데 사용되었다. 놋쇠로 제작된 되로 둥근 그릇에 긴 손잡이가 부착되어 있다. 주둥이가 있는 예와 없는 예가 전해진다.

놋쇠주걱, 식축(食柷),

곡식을 푸는 주걱으로 손잡이 끝부분에 ‘종宗’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제기악기도감의궤』에는 ‘식축(食柷)’으로, <제례의궤도병풍>에는 ‘식비食匕’로 명시되어 있다.

동이, 동해(東海),

표면에 ‘종묘’, ‘영녕전’이라는 전각명과 ‘우牛’, ‘양羊’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다섯 가지 맛을 가한 고깃국인 화갱을 전사청에서 정전과 영녕전으로 담아오는데 쓰인 제기이다. 소.양.돼지의 세 가지 희생으로 만든 화갱이 섞이지 않도록 ‘우’, ‘양’, ‘시’의 글자와 전각명을 표면에 새겼다.

음식물 나르는 들것, 가자(架子),

제사 때 각종 음식과 물건을 운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제사가 끝나면 희생과 제주(祭酒)를 거두어서 가자에 담아 각 전(殿)과 궁의 수라간에 가져다 바쳤다.

삶은 소.양.돼지고기를 담는 세발 솥, 우정(牛鼎).양정(羊鼎).시정(豕鼎),

가마솥에서 삶은 소, 양, 돼지의 고기를 담아 놓은 제기이다. 몸통을 받치는 3개의 발은 각각 소, 양, 돼지 머리와 발모양으로 장식되었다. 우정.양정.시정은 송대 예서의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오례」부터 도설이 등장한다. 현존하는 형태로는 『춘관통고』, 『태상지』, 『제례의궤도병풍』의 도설과 같이 무늬없이 몸체가 2개의 대(帶)로 3부분으로 구획되어 있는 예가 있으며, 『대명집례』의 도설에 따라 상단을 2단으로 나누고 안에 화려한 문양을 새긴 예도 전해진다. 후자의 경우 뚜껑에 ‘우’,’양’,’시’자가 새겨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신을 위한 부엌,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정전의 동북쪽에 위치한 ‘ㅁ’자형 건물로 종묘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집기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마당에는 4개의 돌절구가 있고, 행각 서편에는 음식을 조리하던 아궁이를 지닌 부엌공간이 남아 있다. 전사청 동쪽에는 제례 때 사용할 물을 긷던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다. 전사청 앞에는 제례 음식을 검사하고 익힌 고기를 담는 장소인 찬막단(饌幕壇)과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검사하던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전사청에서는 제사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다양한 제구가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우정, 양정, 시정, 난도, 동해, 중 등을 들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어재실.

각 건물간 국왕이 지나가는 어도로 연결되어 있다.

심신을 청결히 하는 공간, 재궁(齋宮)
종묘 제향을 지내기 전 왕이 머물며 목욕재계를 하고 의복을 정제하는 곳이다. 뜰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어재실(御齋室), 동쪽에는 신관이나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 서쪽에는 왕이나 신관들이 목욕하던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위치한다. 1395년(태조4) 종묘 창건 시 5칸으로 건립되었고, 헌종 대에 정전의 증축으로 인해 동편으로 이전되었으나 규모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정전의 동문 동쪽에 위치하며, 담으로 둘러져 있다.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전 악공청

영녕전 악공청

제례악을 준비하는 공간, 악공청(樂工廳)
종묘 제례 시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건물이다. 숙종대에는 ‘공인청(工人廳)’, 영조대에는 ‘악공청’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10칸짜리 건물로 묘사되었다. 현재 악공청은 정전 담장 바깥 남측과 영녕전 담장 바깥 남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모두 간소한 형태이다. 정전 악공청은 정면 6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하였고 영녕전 악공청은 정면3칸, 측면 1칸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수복방

왕과 왕비의 기일을 기록한 판, 국가판(國忌板),

종묘 정전과 영녕전에 모신 왕과 왕비의 기일.왕릉의 이름과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정전에는 순명황후까지, 영녕전에는 1908년에 추존된 진종소황제까지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보아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종묘비치장부』에 따르면 국기판 2개가 수복방과 소차방에 있었다고 하여, 종묘제사의 실무를 담당한 수복들이 종묘에 모셔진 왕과 왕비의 제삿날을 항시 보고 참조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제례 절차와 의식내용에 대한 실무지침서, 매사문(每事問),

정조가 1796년 종묘에 친림하여 종묘서의 수복(守僕) 9명에게 종묘제례의 절차와 의식에 대해 질문한 내용에서 유래한 책이다. 제례 실무자에게 제례 내용을 숙지시키기 위한 교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후대에 여러 차례 필사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수복들의 거주공간, 수복방(守僕房)
종묘를 지키고 제사준비를 담당한 수복들이 거처하던 방으로 정전의 동문 담장에 잇대어 있다. 왕이 제사를 지내기 전 잠시 기다리는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영조 이전에는 3칸 건물이었으나 정전의 증축에 따라 동편으로 옮겨 지으면서 4칸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헌종 대에 다시 동편으로 이전하면서 가퇴(假退)와 차양(遮陽) 4칸이 덧붙여졌으며, 호문(戶門).소쌍창(小雙窓), 광창(廣窓)이 달렸다. 현재도 4칸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며, 남쪽1칸에는 정전 쪽으로 치우친 판문이 달려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향대청

향을 보관하는 장, 향장(香欌),

종묘(정전)와 영녕전에서 사용하던 향을 보관하는 장이다. 상단의 중앙에 각각 “종묘향장”, “영녕전향장”이라 묵서로 쓴 종이가 붙어 있다. 황칠 아래에 주칠이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한제국기 이후 새로 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고궁박물관>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장, 향축장(香祝欌),

대제(大祭)에 사용할 향(香)과 축문(祝文)을 넣어두던 장이다. ‘향’은 신을 모시는 수단이고 ‘축문’은 제사의 뜻을 고하는 것으로 제사에서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향과 축의 보관처, 향대청(香大廳)
신을 모시기 위해 사르는 향과 신명에게 고하는 축문, 신에게 올리는 예물인 폐백 등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제사일을 맡아 보던 사람이 대기하는 집사청과 향청으로 구성되었다. 본래 정전, 영녕전, 칠사당을 위한 별도의 향청 구역이 함께 모여 있었으나, 현재는 종묘 정전의 향대청만이 남아 있다. 정전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정면 9.5칸의 긴 건물로 앞에는 행각이 놓여있어 남북으로 뜰이 만들어졌다. 향대청에는 향장과 향축장을 두고서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보관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중 <종묘서>, 19세기

종묘서 관원들의 일지,

종묘서 소속 관원들이 근무 내용을 작성한 일지를 모은 책으로 1639년부터 1897년까지 내용이 실려 있다. 제1권~9권, 제11권으로 총 10책이 전해진다. 종묘서의 실무담당자는 령令 이하 직장, 봉사,수복 30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의 각종 기물을 기록한 책, 1934년,

일제강점기에 이왕직 예식과에서 직원을 파견하여 종묘를 관리하였다. 이는 종묘 담당 관청을 따로 둔 조선시대에 비하여 종묘의 권위와 제사의 내용을 대폭 격하시킨 조치였다. 『비치장부』는 종묘의 각종 기물을 기록한 목록으로 제기, 의장물, 집기류, 도서 등의 수량과 위치가 망라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조가 종묘제사 관리의 중요성과 지침을 이르는 현판,

1749년, 영조가 종묘의 묘사(廟祠)와 재관(齋官)에게 제사 의식의 중요성과 그 행동지침에 대해 유시(諭示)한 것이다.

종묘서 관원들의 봉심 날짜와 근무 수칙을 적은 현판, 1741년,

종묘서에 걸려 있던 현판으로 영조가 종묘를 보살피는 봉심(奉審) 의식과 종묘서 관원들의 근무 태도에 관해 전교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종묘의 관리 기구
조선시대 종묘는 종묘서(宗廟署)에서 관리하였다. 『경국대전』에 다르면 종묘서는 예조 소속의 종5품 아문으로 종묘 정전 및 영녕전 일원의 수위를 담당한 관청이다. 종묘서의 감독은 겸직 당상관인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가 맡았으며, 전임의 실무 관료로는 종5품의 영(令) 1명을 필두로 직장(直長), 봉사(奉事), 부봉사(副奉事) 각 1명 등이 근무하였다. 이외에도 당직을 서며 밤낮으로 종묘를 살피는 수복(守僕) 30인과 군인들이 종묘서에 상시 복무하였다. 종묘제례에 참여하는 여러 제관들은 제례를 앞두고 관료 가운데 선정된 인원이었기 때문에 평상시에 종묘를 살피는 종묘서 관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특히 영조와 정조는 종묘서 관원과 수복들에 대한 예법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평소에 종묘를 관리할 때에도 예를 다하고 제례가 있을 때에는 실무자로서 원할한 의식 진행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급관리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종묘서는 1392년 조선의 개국과 함께 설치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폐지될 때까지 종묘를 지켰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의 파견 직원이 종묘를 관리하는 등 국권상실에 따른 제도의 격하를 겪기도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정전(20세기초)

종묘 정전 내부(20세기초)와 신실 내부(20세기초)

종묘로 향하는 영친왕(1922년), 종묘제향을 행하는 영친왕(1918년)

근.현대기의 종묘
1897년 10월12일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완전한 자주독립권 수호를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모든 국가 제도의 격이 제후국에서 천자국으로 높아졌고 종묘의 체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고종은 황위 계승의 정통성과 당위성을 천명하기 위해 직계 4대조(장조, 정조, 순조, 문조)를 황제로 추존했으며 종묘 각 실의 묘호廟號, 시호諡號를 새로 지어 올리고 신주를 고쳐썼다. 또한 종묘의 운영이 오묘제五廟制에서 칠묘제七廟制로 바뀜에 따라 자신의 직계 6대조(장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와 태조를 포함한 일곱 선왕의 신주를 봉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황권 확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종묘는 점차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명맥이 끊겼던 종묘제례는 1969년 복원되어 1971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제향을 위한 준비 공간
종묘에는 정전과 양녕전 등의 제향 공간 이외에도 제사음식이나 음악을 준비하고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등의 준비 공간이 함께 있다. 전사청(典祀廳)은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던 곳으로 정전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향대청(香大廳)은 향(香).축문(祝文).폐백(幣帛) 등을 보관하던 곳으로 정전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악공청(樂工廳)은 종묘제례 때 연주를 맡은 악사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대기하거나 연습하던 건물로 정전 담장 바깥 남쪽과 영녕전 담장 바깥 남쪽에 각각 별도로 서 있다. 종묘에는 제향을 지내는 왕과 제관 그리고 제향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머물거나 대기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재궁(齋宮)은 왕이 머물며 목욕재계를 하고 의복을 정제하던 곳으로 어재실(御齋室), 세자재실(世子齋室), 어목욕실(御沐浴廳)으로 구성되며, 정전의 동문 동쪽에 위치해 있다. 집사청(執事廳)은 제향(祭香)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공간으로 향청 옆에 위치하며, 수복방(守僕房)은 종묘를 지키고 제사준비를 담당하던 수복들이 거처하던 방으로 정전의 동문 담장에 잇대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