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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각동 도편수이승업가옥, 궁궐건축에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목수가 지은 집

조선시대 시전이 설치되었던 운종가에 있었던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이다. 안채, 사랑채와 중문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문간채, 앞뒤 행랑채, 사랑뒤채 등 모두 8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대저택이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몸채에 날개채가 붙은 ‘丁’자형과 ‘ㄴ’자형을 이루고 있다. 대청마루가 있는 안채에는 구한말 유행했던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일반적인 한옥에서는 사랑채에 누마루 형태의 방을 두는데 이 집은 안채에 두고 있다. 사랑채는 앞편 3칸 규모로 크지 않은 편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낮은 담이 있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목수였던 이승업이 집주인의 입맞에 맞추어 적절히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가옥>

원래 이 저택은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목수가 지은 집이다. 구한말 경주이씨 집안에서 1970년까지 거주했던 집으로 조흥은행 사료관으로 사용하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겨졌다. 이 다른 한옥과는 달리 집주인이 아닌 집을 지은 건축가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당시 가옥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지만, 구한말 최고의 건축가가 지은 한옥으로서 의의가 있다.

<안채>

안채는 앞에서 보면 ‘ㄴ’자형으로 생겼지만, 전체적으로는 ‘丁’형태이다. 몸채에 해당하는 대청마루와 건너방은 높은 기단위에 세우고, 부엌과 안방은 낮은 기단위에 세워 놓고 있다. 지붕의 높이 또한 달리하고 있다.

<대청마루>

건너방과 함께 몸채를 이루고 있는 대청마루. 가족 모임이나 집안 행사를 위해서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지금은 옛날 가구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건너방>

안주인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보이는 건너방은 그 형태가 사랑방처럼 생겼다. 구한말에 크게 유행했던 난간이 있는 툇마루로 둘러져 있다.


<건너방 내부>

건너방은 2칸 규모의 큰 방인데, 지금은 가구가 놓여 있지 않아서 더 넓어 보인다.


<툇마루>

난간이 있는 툇마루는 방 주위와 대청마루 뒷편까지 연결되어 있다.

<대청마루의 문을 걸을 수 있는 일명 ‘돼지코’라고 불리는 문걸이>

<부엌>

안채 부엌은 2칸규모의 상당히 큰 부엌이다. 부엌에서 대청마루로 음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작은 창문을 볼 수 있다.

<부엌 내부의 모습>

아궁이가 3개 있고, 아궁이 위로 책들을 보관하는 다락방이 있다. 한옥들은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아궁이 위에 다락방을 두고 있다.

<뒤에서 본 모습>

전체적으로 날개채가 붙어서 ‘丁’를 이루고 있다. 안방과 건넌 방에 굴뚝이 연결되어 있다.

<‘ㄴ’자형으로 생긴 사랑채>

<앞에서 본 모습>

일반적인 사랑채와 달리 부엌을 따로 두고 있는 등 별채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지었다. 기존 한옥 양식과 다른 구한말 서울지역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사랑채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크지 않은 편이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두고 있다. 서재로 사용하거나 손님을 맞는 사랑채의 특징보다는 한가족이 따로 살 수 있는 별채처럼 지었다.

<뒤에서 본 모습>

뒷쪽에서 보면 날개가 달린 ‘ㄴ’자형 주택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옥이 있었던 삼각동 청계천 주변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중촌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궁궐과 주요 관청, 시장인 운종가가 가까워서 중앙관청의 실무를 담당했던 전문직계층이 살았던 지역이다. 특히 부근 장통방에는 역관 집안이 무안박씨가 살았으며, 구한말 한성판윤을 지냈던 한규설이 살았던 집도 있었다. 전문직 중인계층이 많이 살았지만 이 가옥이나 한규설가옥처럼 권문세가 대저택도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옥에 있었던 청계천 광통교 일대(모형)>

광통교 오른쪽에 조흥은행 건물이 있으며, 그 안쪽에 이 가옥이 있었다고 한다.

<청계천 광통교 부근>

 삼각동 도편수이승업가옥,
이 집은 1860년대에 경복궁 중건공사에 참여했던 도편수 이승업이 지은 것이다. 원래 이 집은 청계천 부근의 중구 삼각동에 있었다. 1889년 이후 경주이씨 집안이 이 집에 거주하였으며, 1970년부터는 조흥은행의 사료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남산골 한옥마을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와 중문만이 남아 있지만, 원래 이 집은 문간채, 앞뒤 행랑채, 사랑뒤채 등 모두 8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큰 주택이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몸채와 그에 직각으로 붙어 있는날개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몸채가 더 크고 두터우며 지붕도 더 높고 웅장하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낮은 담이 있어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였으며, 사랑채 부엌의 문도 안채 쪽으로 나 있어 사랑채 영역과 나뉘었다. 이 집은 조선 후기 서울의 주거문화와 당시의 건축기술을 잘 보여 준다. 또한 각 공간의 중요도에 따라 지붕의 높낮이와 모양을 달리하는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며, 안채의 곳곳에 설치된 난간과 툇마루는 편리하면서도 아름답다. <출처:서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