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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향교, 강화부에 설치되었던 중등교육기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남아 있는 강화향교 (江華鄕校)이다. 강화부(江華府) 관아가 있었던 곳에서 조섬 떨어진 서쪽편 강화여중고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향교에는 대성전.명륜당.내외 삼문이 있는데, 최근엥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 대성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의 향교에 비해서는 규모가 큰 편이다.  강화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고려산 남쪽에 세워졌던 것을 갑곶리, 서도면 등으로 이전했다가 1731년 강화유수 유척기가 현재의 위치인 강화읍 관청리로 옮겼다고 한다. 강화는 국왕이 국방상 매우 중요시하던 고장으로 서원이 많이 설치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서원이 지역 여론을 조성하고 교육을 담당하는 기능을 하지 않고, 공교육기관이 강화향교에서 전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강화향교(2011년)>

대성전과 동.서무, 내삼문은 원래의 모습이고 앞쪽으로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서재로 새로이 복원하고 있다.

<홍살문>

<외삼문>

<향교 앞 비석들>

<강학공간 중심이 되는 강당건물인 명륜당>

앞면 4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종2품 유수가 고을수령이었던 강화부 중등교육기관이지만 그 규모는 작은편이다. 다른 향교와 달리 대성전과 일렬로 배치되어 있지 않다.

<명륜당 현판>

<명륜당 앞 툇마루>

<명륜당 뒷편에 관리인이 기거한 살림집>

<강화향교 중문>

<동.서재가 들어서 있는 강학공간 마당>

<동재>

앞면 6칸 규모로 향교 동.서재 건물 중에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맞은편 서재>

<제향공간>

<강화향교 대성전>

강화도는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으며, 고려시대 30년 이상 대몽항전의 중심이 되었던 곳으로 조선초기에는 부윤이 설치되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이런 지정학적인 중요성때문에 유수부를 설치하였다. 숙종대에는 강화산성을 개축하고, 해안에 군사조직인 12진.보와 방어시설인 53돈대를 설치하였다. 강화유수는 조선 인조5년(1627)에 설치된 종2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으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중앙부처(경직)에 해당한다. 법규에는 2인의 유수를 두게 되어 있으나 경기관찰사가 1인을 겸임하기때문에 전임유수가 행정과 군사업무를 전담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강화읍 관청리 옛 고려궁지에 남아 있는 강화부 동헌>

이곳에는 원래 행궁과 외규장각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구한말 병인양요때 불타버렸다. 동헌건물은 그 이후 중건된 것인데 앞면8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강화향교(江華鄕校),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이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47) 내가면 고천리(고읍)에서 창건되었다 전한다. 고종19년(1232) 강화읍 갑곶리(먹절)로 옮겼다가 고종 46년(1259) 서도면 볼음도로 옮겼고 조선 인조 2년(1624)에는 유수 심열이 송악산 기슭으로 옮겼으며 인조7년(1629)에 유수 이안눌이 위패를 모시고 명륜당을 세우는 등 비로소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學宮)이라 하였다 한다. 현종 14년(1673) 유수 민시중이 남산골로 옮겼으나 영조7년(1731) 유수 유척기가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강학하던 명륜당 및 내, 외삼문 등이 있고, 동.서무는 터만 남아 있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근래에 중수 또는 신축되었다. (안내문, 강화군청,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