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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서예실]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글씨와 집자비석

‘집자(集字)’란 필요한 글자를 선택하여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문장을 돋보이게 하거나 높이 기리기 위해 명필들이 글씨를 집자하였는데 주로 비석을 세우는데 많이 이용하였다. 실제 글씨를 집자하는 일은 글씨의 흐름과 새겨야 할 문장의 분위기에 알맞게 선택해야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집자비석 중 고려시대(10세기)에 세워진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은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겨 넣은 것으로 8세기에 활동했던 통일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다. 비석들은 명필들이 살았던 시기와 멀지 않은 시기에 글자를 집자하여 새겼기때문에 원본 글씨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서예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명필의 글씨를 모방하거나 집자하여 비석을 새기는 것은 것은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으로 보이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서성(書聖)이라 일컬어지는 동진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작품인 난정서(蘭亭書)을 모방한 탑본법첩과 또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비석은 중국 당나라의 승려 회인(懷仁)이 왕희지의 글씨를 무려 25년 동안 집자하여 완성하였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한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에는 당태종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으며, <무장사 아미타불 비석>은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글씨, 통일신라 771년

국보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글씨와 문양을 탑본해 전시해 놓고 있다. 앞뒷면 비천상 중간에는 성덕대왕 업적을 찬양한 글과 이 종을 만들게 된 경위 등을 적어 놓고 있다. 직접 쓴 글씨는 아니지만 통일신라시대 서예의 경향을 볼 수 있다.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글씨,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국보29호)은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이다. 봉덕사(奉德寺)종, 에밀레 종으로도 불리는 이 종은 신라 제33대 왕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년)의 공덕을 기리고,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景德王)이 이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당대에 이루지 못하고 혜공왕(惠恭王)이 아버지 경덕왕의 뜻을 이어 구리 12만 근을 들여 완성하였다. 아름다운 비천상으로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의 앞뒷면에는 1천여 자의 양각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종을 치는 목적, 이 신종을 제작하게 된 연유 그리고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앞면에 있는 김부원(金符晼)이 쓴 글씨는 균형이 잘 잡힌 해서(楷書)이며, 뒷면에 있는 요단(姚湍)의 글씨는 날카로운 필치이 글씨이다. 살이 적당히 붙은 필획은 중후한 느낌을 주어 커다란 종과 잘 어울린다. 비록 직접 쓴 글씨는 아니더라도, 통일신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이 글씨는 당시 서예의 수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성덕대왕 신종 앞면에 새겨진 글씨 탑본, 해서,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국보).

신라 명필 김생이 활약했던 8세기에 쓴 글씨이다.

앞면의 글은 성덕대왕에 대한 칭송, 종을 만든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 그리고 신종의 소리로써 명복을 빌고 깨달음을 얻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균형잡힌 해서체로 쓰인 글씨는 통일신라 8세기 서예의 특징인 여유 있는 필획과 유연한 필치를 보여 준다.<출처:중앙박물관>

성덕대왕 신종 뒷면에 새겨진 글씨 탑본, 해서(楷書),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국보)

뒷면에는 찬시(讚詩) 및 종을 만든 이들의 직책과 이름 등이 있다. 찬시의 내용은 앞면과 마찬가지로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신종의 장중한 면모와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찬사, 그리고 신종을 제작한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 성덕대왕 신종.

집자비석
‘집자(集字)’란 필요한 글자를 선택하여 이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작업이다. 문장을 돋보이게 하거나 높이 기리기 위하여 옛날부터 명필(名筆)들이 글씨를 집자하여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대체로 집자는 비석을 세우는 데 많이 이용하였다. <무장사 아미타불을 만든 내용을 쓴 비석, 801년 무렵>,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940년>,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954년> 등 한국의 대표적인 집자 비석이다. 집자는 마치 한 붓으로 쓴 듯 글자 간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일정해야 한다. 또한 한 사람의 서예가가 쓴 똑같은 글자라도 글씨의 흐름과 분위기가 모두 같지 않기 때문에 알맞은 글자를 선택하여 연결하는데 많은 시간이 든다. 중국 당나라의 승려 회인(懷仁)은 왕희지(王羲之, 307~365년, 중국 동진의 서예가)의 글씨를 무려 25년 동안 집자하여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비석을 완성하였다. 집자비석은 그 내용으로 제작의 배경을 알 수 있다는 점뿐 아니라 돌에 새겼기 때문에 글씨가 오랜 세월 보전된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또 집자된 글씨는 당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서예의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에 서예사와 시대별 서체 연구를 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자사(太子寺) 낭공대사 비(郎空大師 碑),

고려초 9세기에 세워진 비석으로 통일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이다. 통일신라의 효공왕과 신덕왕의 국사(國師)였던 낭공대사(832~916년)를 기리는 비석으로 고려 광종5년(954) 지금의 경북 봉화군 태자사에 세워졌다. 비석의 글씨는 김생(金生, 711~791년?)의 행서를 집자한 것인데, 중국 왕희자와 안진경(顔眞卿)의 글씨체 등 8세기 당시 통일신라 서예의 경향을 여실히 반영하면서도 굳세고 강건한 힘을 집어넣어 활달한 필치와 기운이 훌륭히 표현되었다. 집자는 고려의 승려 단목이 하였다. 비석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기록되었는데, 글은 최언위(崔彦撝, 868~944년)가 썼다. 뒷면에는 승려 순백이 쓴 후기가 새겨져 있다. 한국 서예의 신품사현(神品四賢) 가운데 한 사람인 김생은 ‘해동의 서성(書聖)’, ‘신라의 왕휘지’로 추앙받던 명필로서 한국의 서예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낭공대사 비석은 어느 작품보다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출처:중앙박물관>


비석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 글씨.

해동의 서성(書聖)’, ‘신라의 왕휘지’로 추앙받던 통일신라 시대 명필 김생이 쓴 글씨를 집자하였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낭공대사 비석은 어느 작품보다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일반인이 보기에도 글씨에 힘이 있고 기운이 넘친다.


뒷면에는 승려 순백이 쓴 후기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 새겨진 글씨.


비석 옆면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옆면에 새겨진 글씨.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당태종 행서 집자, 고려 940년,

서예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당태종의 글씨를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진공대사(869~940)을 기리며 세운 비석이다. 전시되어 있는 것은 비석의 아랫면이다. 비석의 글은 진공대사를 깊이 존경하던 고려 태조가 지었고, 최광윤이 중국 당나라 태종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뒷면에는 고려태조에게 올렸던 진공대사의 글(表)이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당 태종은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행서에 뛰어났다. 비석받침과 머리돌(보물463호)는 현재 강원도 원주시 흥법사 터에 있고 진공대사 탑과 석관(보물365호)은 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비석에 새겨진 글씨. 당태종이 쓴 행서를 집자하였다.

흥법사 옛절터에 남아 있는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원주 흥법사터에 있던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일제 시대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 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무장사 아미타불을 만든 내용을 쓴 비석, 왕희지 행서 집자, 통일신라 801년 무렵,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동진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를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나라 이후 왕희지의 글씨가 한반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39대왕 소성왕(昭聖王, 재위 798~800)의 왕비 계화왕후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장사 아미타전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신 후 그 내용과 과정을 새긴 비석이다. 무장사 비석은 중국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여 새긴 집자비석으로 매우 중요한 왕희지 글씨 연구 자료이다. 이 비석은 홍양호(洪良浩, 1724~1802)와 추사 김정희가 찾아낸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비석에 새겨진 글씨. 남북조시대 왕희지의 글씨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