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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회화실] 초상화와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

실제 생존했던 인물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당대의 상류층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여서 그렸던 그림이다. 이는 서양의 회화에서도 볼 수 있는 비슷한 경향으로 레오나르드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많은 걸작들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왕의 초상을 그린 어진에서부터 관복을 입고 그린 사대부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이 그려졌다. 인물화는 작가의 주관보다는 현재의 사진과 같은 의미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고 정성스럽게 그려졌다. 인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 인물의 정신적인 특징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이 많았다. 중앙박물관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지만, 회화는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지 않다. 중앙박물관에는 국보 239호로 지정된 송시열 초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초상화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다수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인물화로 이야기속에 전해오는 인물들을 그린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가 있다. 고사인물화는 주로 중국의 유명한 인물들을 그린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을 그린 경우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삶에 교훈을 주거나 이야기속 주인공처럼 되고 싶은 소망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도석인물화는 도교 또는 불교와 관련된 인물들을 그린 그림이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고석인물화로는 17세기 김명국이 선종의 시조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그린 달마도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단원 김홍도는 도교적인 내용을 그린 여러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을 볼 수 있다.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가 그린 고사인물화도 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 2층 회화실 중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

전시작품은 많지 않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전시내용은 수시로 바뀐다.

서원이나 영당 등에 모셔졌던 초상화 중 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들이다.

 대표적인 걸작으로 국보로 지정된 송시열 초상화와 윤두수의 자화상을 들 수 있다.

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조선시대 초상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조선후기 지배계층이었던 서인이 영수이자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송시열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국보,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평상복 차림인 심의(深衣)에 복건을 쓰고 공수 자세로 오른쪽을 향한 반신상이다. 송시열(1607~1689)은 평생 주자의 학설을 잇는 것으로 자부했다. 그의 제자들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후학들은 송시열을 추앙하고 존승하였다. 화면 상단에 어제와 1778년 간기(干記)가 있어서 18세기에 그려진 이모본으로 보인다. 얼굴의 주름과 수염에 가해진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며, 옷 주름은 고른 선으로 간략히 표현되어 있다. 왼쪽 어깨가 오른쪽보다 약간 올라가 있으며 목이 앞으로 나온 구부정한 노인의 자세, 화면의 반을 차지하는 과장된 체구 등은 조선후기 학문과 사상을 지배한 거유(巨儒)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임경업 초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 중 하나이다. 병자호란 당시 활약한 명장으로서의 기백이 넘치는 초상화이다.

임경업(1594~1646)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본관은 평택, 자는 영배, 호는 고송, 시호는 충민이다. 1618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4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병자화란 때 활약하다가, 끝까지 청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고 1643년에 명나라에 망명하여 명군의 총병이 되었다. 친명배청의식이 높았던 병자호란 이후 우국충정의 명장으로 인식되었으나, 결국 청의 승리로 조국에서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오사모에 푸른색 단령을 착용하고 정면을 향하고 앉은 관복전신좌상이다. 흉배는 인조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무인들에게 내려주었던 독특한 모양이다. 주인공 옆 탁자에 놓은 세한삼우(소나무, 매화, 대나무)는 그의 절개를 상징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시백 초상, 조선후기, 비단채색

이시백은 인조반정의 주역인 이귀의 장남으로 아버지 이귀, 동생 이시방과 함께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에 녹훈되었다. 또한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에서의 패전 상황을 수습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효종대에 연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사모를 쓰고 청색 단령을 입고 있는 반신상이다. 화면 상단에 “정사공신 영의정 연양부원군 충익공 조암이선생진상”이라 묵서되어 있다. 사모의 높이가 매우 낮고 모정이 평평하며 양각이 짧고 넓은 점, 흉배가 큰 점은 조선 중기 복식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유순정 초상, 조선후기, 비단채색

유순정은 본관 진주, 자는 지옹 시호는 무안, 문성이다. 1506년 중종 반정에 공을 세우고 정국공신 1등으로 청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이과의 옥사를 다스려 정나공신1등에 책록되었다. 1509년 좌의정에 오르고 1510년에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삼포에서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삼포왜란 때에는 직접 경상도도원수로 출정, 난을 평정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반신상 초상화로 오사모에 금으로 그려진 한 쌍의 공작이 부착된 흉배를 착용하고 있다. 오사모의 양쪽 각이 둥글고 흉배가 금으로만 그려진 점은 조선 초기 공신 초상화의 특징이나 어깨 선을 각지지 않고 둥글게 처리한 점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이모본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조경 초상, 17세기, 비단채색

조경(1541~1609)은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풍양이며 자는 사척, 시호는 장의이다. 임진왜란 때 수원부사로 재임하면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의 권율 장군을 응원하고 이듬해에 다시 도원수였던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대승하여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도성서도포도대장이 되고, 1596년에는 훈련대장이 되었다. 1599년 충청병사,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1604년에는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고 풍양군에 봉해졌다. 오사모에 단호흉배가 부착된 흑색 단령을 착용하고 앉아 있는 전신교의 좌상이다. 바닥에는 채전이 깔려 있다. 얼굴과 이목구비, 수염을 그린 선이 매우 활달하다. 얼굴에는 붉은 빛으로 음영과 입체감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광대뼈 쪽에 홍기를 두드러지게 가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원익 초상, 17세기, 종이에 색

이원익(1547~1634)의 본관은 전주, 자는 공려, 호는 오리이다. 태동의 12번째 아들인 익령군의 4대손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세자와 왕을 호위하였다. 모란 공작 흉배를 부착한 흑자색의 운문단 단령을 입고 앉은 관복전신교의좌상이다. 전신상 초상화이면서 종이 바탕에 초본 형식으로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비단에 그려진 정본 초상화와는 달리 필치 구사와 채색 바탕이 매우 자유롭다. <출처:중앙박물관>

남구만 초상, 작가모름, 비단에 색.

조선후기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의 온화한 표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조를 남긴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다. 남구만 초상은 녹포단령(깃을 둥글게 만든 푸른색의 공복) 차림에 양손을 앞으로 모아 소매 안으로 넣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모습은 조선시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모는 높아지고 폭은 약간 좁아졌으며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구름과 학이 포함되어 있다. 얼굴 살결은 이전에 비해 가는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 영정 외에 남구만이 영의정 재직시에 모사한 영정이 현재 경기도 용인시 파담마을에 위치한 사당에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윤봉구 초상, 작가모름, 18세기, 모시에 색.

복건을 쓰고 있는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복건에 심의를 입은 반신상 한 점이 함께 첩으로 꾸며져 있다. 윤봉구는 호는 병계, 또는 구암이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대사헌을 지낸 성리학자다. 갈색 선으로 얼굴의 윤곽, 코 등을 그리고 선염을 가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정보 초상,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강하면서도 꼿꼿한 인품을 잘 드러내고 있는 초상화이다.


이정보 초상,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이정보(李鼎輔, 1693~1766)는 예조판서, 대제학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른 사람이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시조(時調)의 대로서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쌍학 흉배가 달린 청색 단령(團領)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목구비는 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분홍색으로 밝고 화사하게 칠하였다. 짧은 선을 그어 양 볼의 양감을 살렸다. 종이품 이상의 학정금대(鶴頂金帶)를 착용하고 있어 이정보가 1748년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할 즈음의 모습으로 보인다. 신체에 비해 의자와 발받침대의 비중이 작고 장식적인 요소가 절제되어 있는 전신 초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분무원종공신녹권(奮武原從功臣錄券), 1728년

공신녹권에 실린 초상화,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분무공신 녹훈 관련 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분무녹훈도감에서 편찬하였다. 1등 공신에는 오명향, 2등 공신에는 박찬신.박문수 등 7명, 3등 공신에는 조현명 등 7명으로 모두 15명이 녹훈되었다. 책머리에 윤순이 쓴 분무토역반교문이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아라이 하쿠세키 초상, 츠바키 산잔, 일본 에도, 1828년, 종이에 색,

우리나라 초상화에 비해 표현이 섬세하다.

에도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의 초상이다. 호피로 만든 방석 위에 허리에 칼을 찬 채 무릎 꿇은 자세로 앉아 있다. 짙은 눈썹과 연한 수염이 대조를 이루는 얼굴은 찌푸린 미간, 꾹 다문 입술 등을 통해 온화하면서도 의로운 인상을 풍긴다. 선 위주의 그린 이목구비에 연한 홍조를 띠게 함으로써 얼굴의 생기를 불어 넣었다. 초상을 그린 츠바키 산잔은 에도 후기의 문인화가로서 와타나베 카자(1793~1841)에게 그림의 사사를 받았다. 카잔이 투옥되었을 때, 산잔은 그를 구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고, 스승의 유족들을 보살폈다. 산잔은 명말청초의 운수평(惲壽平, 1633~1690)의 몰골과 담채의 기법으로 화훼도를 그렸다. 후쿠오카 현의 태수이 미나모토 요시의 찬문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인 초상, 작가 모름, 중국 청,

한국의 초상화와는 달리 사진을 찍은 듯한 사실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권위의 상징물인 호피 위에 위엄 있게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만주족 관리의 관복 좌상이다. 바닥에는 꽃무늬 채전(彩氈)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삿갓 모자를 쓰고 발 받침대 위에 다리를 벌린 채 앉아 있는 관리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중국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양손이 소매 밖으로 나오지 않고 가려져 있는 점이 다르다. 청색 조복(朝服)차림의 주인공은 큰 키에 시선의 교환을 통해 관자(觀者)와의 상호작용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다부진 인상을 풍긴다. 마치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듯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초상화
초상화(肖像畵)는 생존했던 인물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진(眞), 영(影), 상(像), 진영(眞影)이라고도 부른다. 훌륭한 인물을 본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기 시작하여 조상이나 스승을 섬기고 추모하기 위하여 그렸다. 초상화를 그린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확인되지만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때는 고려시대이다. 현재 남아 있는 초상화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인물의 신분과 성격에 따라 왕, 어질고 지혜로운 성현과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 벼슬이나 무벌이 높은 사대부, 여인, 승려의 초상이 전해진다. 특히 조선 후기의 사대부 초상은 관복이나 평상복 차림으로 많이 그려졌다.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털 한 올이라도 본래의 모습과 차이가 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들였다. 또 인물의 외모뿐만 아니라 인품과 학식 등 정신적인 면까지 표현하고 노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영당과 영당에 모셔진 초상화.


안향 초상, 안향상(安珦像),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안향(1243~1306) 초상은 홍포(紅袍) 직령(直領)에 평정건(平頂巾)을 쓴 모습이다. 상단에는 그의 아들 안우기(安于器, 1265~1329)가 쓴 발문과 찬시가 있는데, 이것에 의하면 1318년 왕명으로 초상화를 그려 문묘에 봉안하고, 한 벌을 더 그려 고향인 홍주 향교에 모셨다고 한다. 이 초상은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표현하고, 원만한 몸체에 옷 주름을 곧고 간결하게 묘사하여 단아하고 엄정한 기품이 있다. 조선 후기의 이모본이지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고려시대 초상화의 자료로서 중요하다. 안향이 도입한 주자학이 조선시대에 사상의 주류로 정리됨에 따라, 선학(先學)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 초상화가 이모되고 전승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가 깊다. <출처:중앙박물관>

영당에 모셔진 초상, 18세기, 비단에 색

사모에 흉배 없는 담홍포(淡紅袍)와 삽은대(鈒銀帶)를 착용한 반신좌상이다. 화면에 주인공에 대해 알려주는 단서는 없으며 성모씨의 초상으로 전래되고 있다. 얼굴은 갈색 선으로 윤곽선과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이마, 콧등, 콧망을, 귀에 붉은기를 주고 눈 주위와 법령에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옷주름은 다소 딱딱하며, 옷주름을 많이 묘사하지 않아 단정한 느낌을 준다. 얼굴 묘사에 있어서 콧날의 선과 눈두덩이, 법령 등을 윤곽선으로 표현하고 피부의 색조를 선염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반경의 초상화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영당
영당(影堂)이란 초상화를 모신 곳을 말한다.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삶의 모범이 된 충신과 학자 등의 초상화를 이곳에 모셨다. 영당에 초상화를 모신 이유는 선현의 훌륭한 업적을 후세까지 널리 전하고 조상의 높은 뜻을 일깨우는 데에 있다. 초상화를 모시는 풍습은 신라 말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절에 영당을 지어 초상화를 모셨는데 이러한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집 안에 짓는 사당이 가묘(家廟)가 발달하면서 영당도 많이 세워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달마, 김명국, 17세기.

달마도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그림의 주제 중 하나인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달마도>라고 할 수 있다. 빠른 붓놀림과 과감한 생략 등을 통해서 그려진 상당히 수준 높은 그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달마대사의 모습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달마대사의 모습은 이 그림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림이다.

달마는 선종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로 손꼽히며, 김명국의 현존하는 그림 가운데 걸작이다. 측면을 향한 달마대사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팔자 눈썹에 부릅뜬 눈, 주먹같은 메부리코, 짙은 콧수염과 구레나룻 등의 생김새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9년동안 벽을 향해 좌선 수행행하였던 그의 진면목, 피안의 진리를 깨닫고자 힘쓴 그의 정신 세계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빠른 붓놀림과 과감하게 생략한 표현 등은 김명국이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음을 말해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세명의 신선, 김홍도, 1779년, 비단채색.

단원 김홍도가 그린 신선도로 그가 그린 작품의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김홍도는 풍속화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도교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장면 등을 많이 그렸다.

표암 강세황의 화평이 매 폭마다 적혀있는 단원 김홍도의 인물화 중 한 폭이다. 마지막 제8폭에 적혀있는 글씨에서 1779년 그의 나이 35세 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하여 ‘특히 신선과 화자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하다’고 한 바 있다. 이 그림은 칼을 차고 있는 여동빈을 가운데에 그리고, 그 위에 여동빈의 스승인 종리권, 제일 아래에 종리권의 선생인 동화자를 그린 <삼선도>이다. 유려하고 여유있는 김홍도 후대의 화풍과는 달리 딱딱한 선묘의 특징을 보인다. 바탕에는 담묵을 칠하여 고아한 분위기를 내고 있으며, 다양한 농도의 채색과 금채, 호분을 적절하게 구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원에서의 아취 넘치는 모임, 김홍도, 1778년, 비단에 엷은 색.

김홍도가 34세 때에 그린 고사 인물화이다. ‘서원아집(西園雅執)’이란 송나라 때 왕선(王詵)이 자신의 집 정원인 서원에서 친구인 소식(蘇軾)을 비롯한 당시 유명한 유학자, 승려, 도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던 모임을 말한다. 이 모임에 참여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이 이를 그려 <서원아집도(西園雅執圖)>라 하였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도 고사인물화의 소재로 유행하였다. 그림의 내용은 탁자 위에서 서화를 완성하는 장면, 암벽에 동자를 데리고 시를 새기는 광경, 담소하며 비파를 타는 정경, 그리고 석교 건너편의 대나무 숲에서 한담하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소나무와 암벽에 보이는 필치는 김홍도가 30대에 정립한 독특한 표현법으로 필선이 명로하고 세밀하여 화려하고 말끔한 느낌을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선생, 윤두서, 1715년, 비단에 색.

중국 북송 때의 학자 진단(陳摶)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나라가 다섯번이나 바뀌어 혼란하던 시절에 참된 군주를 기다리던 진단은 나귀를 타고 가다가 나그네로부터 우연히 조광윤(趙匡胤)이 송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그는 나귀에서 떨어지면서 “이제 천하는 안정되리라”고 외쳤다고 한다. 윤두서(尹斗緖)는 화사하면서도 산뜻한 청록을 써서 태평성대를 바라는 군주와 백성의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숙종이 그림을 감상하고 덧붙인 시가 화면의 상단에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옛 왕후들의 이야기, 열조왕후도(列朝王后圖), 작가모름, 조선, 비단에 색,

 송나라 태조(재위960~975)의 어머니 황태후 두씨(杜氏)가 아들 태조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일꺠워 주고 있는 장면.

송나라 영종(英宗, 재위1064~1067)의 황후 고씨(高氏)가 문병을 온 신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중국의 역대 왕후의 행적을 그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과 왕후의 사적을 궁중 화원들에게 그리게 한 기록들이 있다. 주문왕(周文王)의 후비인 제(齊) 효공부인(孝公夫人) 맹희(孟姬), 초(楚) 번희(樊姬), 한(漢) 명덕황후(明德皇后), 당(唐) 장손황후(長孫皇后), 송(宋) 인종(仁宗) 조황후(曺皇后) 등이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송나라 태조(재위960~975)의 어머니 황태후 두씨(杜氏)가 아들 태조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일꺠워 주고 있는 장면과 송나라 영종(英宗, 재위1064~1067)의 황후 고씨(高氏)가 문병을 온 신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러한 그림은 옛 성현들을 본받고 성찰과 교훈의 자료로 삼아 덕치를 행하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감계화(鑑戒畵)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공자의 행적, 성행도(聖行圖), 김진여(金振汝, 1675~1760), 조선 1700년, 비단에 색,

공자가 수레를 타고 여행을 하는 장면이다.

공자가 제후를 만나는 장면으로 보인다.

김진녀는 평양출신으로 조세걸의 제자이다. 1713년 숙종어진도사에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될 정도로 설채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다. 이 화첩은 공자의 생애 동안 일어난 중대한 사건이나 일화를 그린 것이다. 원나라화가 왕진붕(王振鵬)이 그린 성적도(聖蹟圖)를 모사한 것으로 유소년기의 공자, 직무에 충실한 인품의 소유자, 박학다식한 면모, 교육자,공자의 가르침, 성인으로서의 남다른 혜안, 수양의 모습, 수난과 시기의 대상이 된 모습, 제자들의 공자 섬김과 덕행, 후대 왕들의 공자 받들기 등 공자와 주변 인물들의 일화들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치한 솜씨를 띠며, 공자의 얼굴에 음영을 많이 가한 점, 시공간을 달리한 장면 배치 등이 흥미롭다. <출처:중앙박물관>

고사.도석 인물화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의 인물을 그린 것이다. 주로 중국의 유명한 인물을 그린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그린 것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삶에 교훈을 주거나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되고 싶은 소망을 나타내며, 때로는 현실을 풍자하려는 의도를 담기도 한다.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는 도교, 불교와 관련된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도교의 소재로는 신선을 그린 것이 많으며, 장수와 화복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좋아하였다. 불교의 소재로는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達磨)를 비롯하여 부처의 제자인 나한(羅漢)을 주로 그렸다. <출처:중앙박물관>

초상화의 제작과정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은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1744)》 중 <이의현 초상>의 제작 과정을 추정하여 다음과 같이 재현해 보았다. 초상화 제작의 전체 과정 속에서 초본의 역할을 살펴 보면 보다 명확하게 초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작품조사

유지(油紙) 초본 제작

비단 정본(正本) 제작

1) 유지 위의 유탄초(柳炭草), 2) 유지 위의 먹선초, 3) 유지 초본 뒷면의 색,

 4) 앞에서 유지초본 마무리 5) 유지초본 위에 비단을 올려놓고 먹선 그리기 6) 초본의 먹선 따라 그리기 완성,

 7) 비단 뒷면의 색, 8) 팡에서 비단 정본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