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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회화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우리 산천을 그린 그림

조선 후기에는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가 그려졌다. 주위 존재하는 실제 경치를 그리는 전통은 고려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이를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라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종래의 형식적이며 상투적인 산수화풍에서 벗어나 우리산천을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접목시킨 자연 친화적인 풍류의식이 진경산수화의 밑바탕이 되었다. 진경산수화는 전통적인 산수화와는 달리 직접 빼어난 명승지를 보고 느낀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서양에서 인상파 등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후기 화가 정선이 개척한 화풍으로 민간이 사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풍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조선은 사회가 안정되면서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 유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이때 받은 감동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선 이후 강세황, 김홍도 등의 화가들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둘러본 뒤 그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이후 진경산수화는 19세기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이 득세하면서 쇠퇴하였으나, 일반인들이 그린 민화 소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仁旺齊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정선의 <장동팔경첩>, 심사정의 <경구팔경첩>, 강세황의 <피금정도> 등을 볼 수 있다.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백운동도(白雲洞圖),

실제 경치를 보고 느낌을 그린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새로운 화풍을 그린 겸재 정선의 특징이 잘 나타난 그림이다. 한양에서 늘상 보이는 인왕산 경치를 그렸다. 작자가 풍경을 보고 그 느낌을 반영하여 재창조한 서양의 인상파와 비슷한 성격의 화풍이다.

창의문도(彰義門圖).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과 주변 경치를 그렸다.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정선(鄭敾, 1675~1759) 18세기, 종이에 엷은색
장동은 인왕산 남쪽 기슭에서 백악산의 계곡에 이르는 지역으로 지금의 효자동, 청운동에 속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권문세가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 화첩에 그려진 여덟곳은 장동에 위치한 명문가의 저택이나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유명한 명승지들이다. 소략하면서도 경관의 핵심을 전하고 있어 여유있고 완숙한 노년기의 역량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풍악도첩(楓嶽圖帖)-1, 정선, 조선 1711년, 비단에 엷은 색.

정선이 젊은 시절 금강산을 유람한 그린 그림이다. 실경산수화에 가까운 그림이다.

풍악도첩-2

겸재 정신이 절친한 벗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강원도 김화현감(金化縣監)을 지낼 때, 백석 신태동(辛泰東, 1659~1729)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남긴 화첩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정선의 기년작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그의 나이 36세 때 완성하였다. 총 14면의 화첩에는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린 13면의 그림과 제작내력을 적은 발문 1면이 수록되었다. 각 장면에는 금강산 곳곳의 지명을 적었고, 산의 형세와 특징에 따라 다양한 준법과 구도를 사용하여 꼼꼼히 묘사하였다. 정선의 초기의 산수화풍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도, 정선, 비단에 엷은색

2층 정자에는 창을 활짝 연 채 경치를 감상하는 맨 상투 차림의 선비가 앉아 있다. 오른쪽에 치우쳐 서 있는 산봉우리가 위용을 자랑하는데 산 중턱을 가로질러 피어 오르는 안개가 그 높이감을 더욱 강조한다. 필법 역시 활달하고 난숙하여 거침이 없다. 화면 상투에는 강세황이 쓴 화평이 있는데 “정선 노인이 중년에 그린 최고 득의작”으로 평하였다. 공간의 높이감, 깊이감이 조화된 대작이다. 60대 이후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청신한 경치와 인물의 분위기 때문에 하경산수라 불리기도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백탑동(白塔洞),

금강산 명승지 풍경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명연(鳴淵)

삼불암(三佛嵓)

금강산도(金剛山圖),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금강산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와 사찰 등을 포함하여 모두 75곳의 금강산 명승지들을 그린 그림이다. 각 장면마다 지명을 적어 놓아 장소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림의 소재와 그린 수법이 조선후기 작가들의 금강산 그림 계보를 잇고 있는데, 실제 경치를 그렸음에도 대상을 간략하고 도식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정교하고 세련된 필치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김홍도나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이후 활동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피금정도(披襟亭圖), 강세황(姜世晃), 1789년, 비단에 먹.

조선후기 대표적인 화가인 강세황이 그린 작품으로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에 속하는 그림이다.

강세황(1713~1719)은 산수, 화조 등 다방면의 소재를 다루면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당시 화단에서 비평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이 그림은 큰아들이 강원도 회양부사(淮陽府使)로 부임했을 때 강원도 금성(金城)의 피금정을 지나며 본 경치를 이듬해인 1789년에 그린 것이다. 피금정은 보통 한양에서 금강산을 가는 여정에 위치하여, 많은 유람객들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우측에 남대천이 흐르고 그 오른쪽 강안의 작은 건물이 바로 피금정이다. 좌측 하단에 시동을 데리고 지나가는 노인도 보인다. 피금정에 이르기 전 험준한 산세를 독특한 기법으로 표현하여, 멀리 펼쳐지는 산맥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출처:중앙박물관>

죽서루도(竹西樓圖), 강세황, 18세기, 종이에 먹.

관동팔경 중 하나인 죽서루 주변을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삼척 도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태백 부근에서 발원한 오십천이 동해바다로 흘러들어가지 직전에 위치한 죽서루 주변의 풍경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강원도 삼척의 죽서루를 그린 것이다. 그림에 보듯이 죽서루는 절벽 위에 위치하며 앞으로 물이 흘러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일찍이 관동팔경 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유람하였고, 많은 화가들이 이곳을 그렸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의 백악산, 백악산도(白岳山圖), 김윤겸(金允謙), 1763년, 종이에 엷은 채색.

경복궁과 청와대 뒷편에 있는 북악산을 보고 그린 그림으로 진경산수화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윤겸(1711~1775)은 안동김씨 김창업(金昌業)의 아들로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겸재 정선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로 진경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은 서울 백악산(북악산)을 그린 것이다. 1774년에 제발문을 위에 쓴 성와(醒窩)라는 호를 가진 인물은 겸재 정선 이후 김윤겸이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고 밝혔다. <출처:중앙박물관>

관동지역의 명승지 풍경, 해산도첩(海山圖帖), 김하종(1793~), 1815년, 비단에 엷은 색

금강산, 설악산, 동해안 일대의 경치를 그린 화첩이다. 김하종은 조선후기의 화원화가로 김득신의 아들이다. 이광문이 쓴 서문에 1815년 김하종이 그와 함께 금강산을 돌아본 후 그렸다고 밝히고 있다. 정선, 김홍도 화풍의 영향이 엿보이며, 표현에서 도식적인 면을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세검정도(洗劍亭圖), 유숙(劉淑,1827~1873), 19세기, 종이에 엷은 채색.

세검정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실제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세검정은 서울 북악산 시냇가에 자리한 정자로 1747년에 지어졌다. 인조반정때 사람들이 여기에서 ‘칼을 씻으면서’ 반정을 논의 했다고 하여,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너럭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과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유숙은 조선 19세기 화가로, 호는 혜산(惠山)이며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활동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강가에서 들리는 피리소리, 강안청적도(江岸聽笛圖), 김응환(1742~1789),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도화서 화원으로 남종화와 진경산수화에 능했다. 정조의 명으로 김홍도와 함께 일본 지도를 그리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으나 부산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후 김홍도가 쓰시마에서 일본지도를 모사해 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김응환은 정조 어진 그리는 일에 참여하였고 178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김홍도와 함께 영동지역과 금강산을 유람하며 실경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소나무 아래에서 선비가 강 저편 갈대밭 사이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바위에 보이는 부벽준과 먹의 농담 대비, 기울어질 듯 뻗은 소나무는 웅장하다. 붉고 푸른색의 설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미묘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 근교의 경치, 경구팔경첩(京口八景帖), 심사정, 1768년, 종이에 엷은 색.

남종화풍의 문인화를 많이 그렸던 심사정이 그린 진경산수화이다.

심사정은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지 않았으나, 드물게 남아 있는 예가 바로 <경구팔경첩>이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던 한 폭으로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서울 근방의 경치를 그린 실경산수다. 소를 몰고 돌아오는 목동이 근경에 그려졌다. 근경부터 원경까지 꽉찬 구도를 취하고, 물기가 많은 먹과 담채를 사용하였다. 강세황의 평이 함께 전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뱃놀이, 선유(船遊), 심사정, 1764년, 종이에 엷은 색

문방사우와 홍매, 그리고 고목 위의 학까지 마련된 문인취향의 선유가 소용돌이치는 험한 파도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水波法(물결을 표현하는 기법)이 인상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금강산 명연담, 명연담도(鳴淵潭圖), 정충엽(鄭忠燁), 18세기, 비단에 엷은 색

금강산 명연담을 그린 그림이다. 정충엽의 자는 일장.아동, 호는 이호.이곡이며, 조선 후기의 중인 문인화가로 내의원침의(內醫院鍼醫) 출신이다. 그림 외에 예서에도 능했고 강세황과 친분이 있었다. 담채 효과가 돋보이는 세련된 화풍을 보이며 진경산수를 잘 그렸다. <출처:중앙박물관>

석문의 경치, 김윤겸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함경도의 과거시험, 1664년, 복제본.

조선시대에는 의궤 등 많은 기록화나 지도 등의 그림을 남겨놓고 있는데, 이들 그림은 기록화의 의미도 있지만 산수화로서도 수준 높게 그려진 작품이 많다. 정선이 개척한 진경산수화 처럼 실제 존재하는 우리나라 산천을 그림으로 옮겨놓고 있다.

<북새선은도>는 함경도 길주목과 함흥부에서 실시된 과거시험 장면을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그린 기록화이다. 문무과 시험을 치르는 <길주과시도>와 함흥 관아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함흥방방도>로 구성되어 있다. 두루마리 맨 끝에는 시험관 명단, 시험일자, 제목, 합격자 명단 등 과거 시험과 관련되 사항을 적어 놓았다. 함경도 지역의 실제 경치를 배경으로 그려, 기록화로서 뿐만 아니라 17세기 실경산수화로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인물도, 소야(疏野), 활달하여 예법에 얽매이지 않음

산수인물도, 호방(豪放), 의기가 강하여 거리낌이 없음.

산수인물화첩(山水人物畵帖), 전 이정(1578~1607), 조선중기, 종이에 먹

30세의 나이로 요절한 화가 이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화첩이다. 화첩에는 총11폭의 그림이 실려 있다. 그 중 한 폭의 인물화에는 물이 불어난 강 위에 도롱이를 쓰고 노를 젓는 인물을 그렸다. 물기를 많이 머금은 진한 먹을 구사하였으며, 강하고 힘있는 필치로 그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옛 그림에 쓰인 재료
옛 그림은 재료에 따라 크게 수묵화(水墨畵)와 채색화(彩色畵)로 구분할 수 있다. 수묵화에서는 붓과 먹을 쓰는 방법인 용필법(用筆法)과 용묵법(用墨法)이 매우 중요하며, 물과 먹으로 흑백의 어울림을 조절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채색화는 먹 이외에 여러 가지 채색 안료를 사용한 그림이다. 옛날에는 흙이나 돌과 동식물에서 원료를 채취하여 안료로 사용하였다. 광물성 안료의 예를 들면 녹색은 공작석(孔雀石)을, 청색은 남동석(藍銅石) 등을 갈아서 만들었다. 동물의 분비물이나 뼈 등에서도 안료를 얻었다. 식물성 안료는 풀과 꽃에서 채취한 것으로 투명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은 안료 이외에 인공적으로 합성한 안료도 많이 사용하여 여려 색깔을 냈다. <출처:중앙박물관>

<북새선은도>에 사용된 다양한 안료.

석록(石綠, 녹청색), 공작석(孔雀石)을 곱게 갈아서 만든 것으로 녹색을 띤다. 입자가 굵으면 진한 암녹색이 되고, 입자가 고우면 벽녹색이 된다. 주로 산, 버드나무, 전각의 난간 등에 사용되었다.  석청(石靑), 남동석(藍銅石)에서 얻은 안료로 색이 푸르고 선명한 것이 좋다. 산, 언덕, 무관의 복장 등에 사용되었다. 대자(代赭), 철광석 계통의 갈색, 적색 안료로 투명도가 뛰어나다. 뛰어가는 말이나 전각의 회랑, 문, 깃발을 거는 깃대 등에 사용하였고 진사와 섞이면 적갈색을 띤다. <출처:중앙박물관>

 연백(鉛白), 연백은 백토, 운모, 호분처럼 흰색을 띤다. 성곽 위 인물의 얼굴에 사용하였다. 연백에 진사를 섞으면 함량 비율에 따라 붉은색 또는 분홍색을 띠는데 여기서는 관복에 사용되었다. 진사(辰砂), 붉은색 진사는 천연 광석을 빻아서 만든 것으로 비교적 변색하거나 퇴색하지 않는다. 연백과 섞으면 밝은 붉은색을 띤다. 연단(鉛丹), 연단은 주홍빛을 내는데, 붉은 진사와 혼합하여 깃발과 관리들의 관복, 팔작지붕의 면, 전각의 기둥, 꽃 등에 사용되었다. 황단(黃丹), 노락색 안료로 하얀 연백(鉛白)을 낮은 온도에서 가열하면 황단이 된다. 깃발의 면, 건물 마룻바닥 등에 주로 사용하였다.

 진사(辰砂), 남동석, 공작석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진경산수화는 우리 산천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경치인 실경을 그리는 전통은 고려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개척하였다. 그의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우리 산수를 다루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 여행하며 살펴본 우리 산천을 가장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독창적이고도 한국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18세기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명승지를 찾아 전국을 유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자연에서 받은 감동과 즐거움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일도 많아졌다. 정선 이후 강세황, 김홍도, 정수영 등 여러 화가들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돌아본 뒤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자연의 사실적인 모습보다 화가의 정신성을 중시하는 김정희의 예술 사상이 진경산수화의 제작을 주춤하게 하였으나, 진경의 소재는 민화로 즐겨 그려졌다.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우리식의 표현법으로 그린 진경산수화는 가장 한국적인 산수화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