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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시대 관요에서 만들어진 백자는 주로 왕실에 납품하였다. 백자는 그릇이라는 원래의 용도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왕실에서 사용했던 다양한 백자들이 남아 있는데 국가 의례에 사용되었던 제기를 비롯하여, 왕실가족의 태를 묻었던 태항아리, 무덤에 같의 묻었던 명기나 묘지석 등에도 백자가 사용되었다.

백자태호, 조선 19세기.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
백자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에는 출생한 아기의 태를 좋은 곳에 묻어야 건강하고 귀하게 성장한다고 믿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아기가 출생하면 국운과 연관지어 태(胎)를 소중히 다루고 좋은 땅에 묻는 안태의식을 치렀고, 이 의식에서 태를 봉안하는 용기로 무늬없는 순백자의 태호(胎壺)를 사용하여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례의 용기로도 백자는 특별 제작되었고 조선 오례 중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길례(吉禮)에서 제기로 사용되었다. 제기는 보수적 성격을 가지고 금속으로 제작되었다가 도자로 대체되어 생산되기도 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관요지에서 청화.철화로 ‘祭’자 명을 써 넣거나 굽을 높게 한 발과 접시 형태의 백자제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높은 굽을 가진 고족접시는 제사 용도 외에 손님 접대나 연회 등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조상이나 신을 높이 받드는 것과 같이 공경과 존경의 의미를 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백자는 죽음의 의례에서도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왕실을 비롯한 일부 지배계층에서는 명기(明器)와 묘지(墓誌)를 만들어 무덤에 함께 부장하였고,16세기 이후에는 이를 세트로 구성하여 매장하는 관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명기는 인물상이나 그릇 등 생활용기를 작게 만든 것으로, 화려한 기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선의 예제에 따라 무문을 기본으로 하여 드물게 청화.철화 장식이 나타난다. 묘지는 묘주의 생몰연월일과 행적, 무덤에 대한 기록 등을 담고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태항아리(胎壺)

태항아리는 아기의 태를 담는 항아리이다. 조선왕실에서는 아기이 태를 백자항아리에 담아 태봉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왕실가족의 태를 담았던 백자 항아리는 당시 사람들이 소중히 여겼기때문에 조형미나 제작수법이 대체로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백자 태호, 조선 1481년

태지석, 조선 1481년

제기(祭器)

제례에 사용되었던 제기는 백자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청동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남아 있는 백자 제기 중 예술적으로 우수한  것은 많지 않아 보인다.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조선 19세기(복사본), 제상(祭床).향상(香床), 조선 19세기~20세기초,

백자 고족접시, 조선 19세기

백자 모사기,향로, 조선 19세기

명기(明器)

명기는 무덤에 죽은 사람의 사후세계를 위해서 같이 묻는 껴묻거리로 옛고분의 토기 등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명기는 실생활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간소하게 만들어져 토기와 마찬가지로 조형미가 우수한 명기는 많지 않아 보인다.

백자 명기, 조선 16세기,

백자명기, 조선 16세기

백자철화 명기, 조선 17세기

백자철화 명기, 조선 17세기

묘지(墓誌)

백자청화 숙의윤씨 묘지, 조선 1568년

연산군 후궁 숙의윤씨(1481~1568)의 묘지로서 3매로 되었고, 뒷면에는 순서를 따라 청화로 ‘第一場’, ‘第二張’, ‘第三張終’이라고 쓰여 있다. 윤씨는 1481년에 출생하였고 1501년(연산군 7년) 연산군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가 되었는데, 중종반정(1506) 후 돌아갈 곳이 없어 조카인 윤씨를 양녀로 삼아 후사를 맡겼다고 적혀 있다. 향년 63세, 1568년에 사망하였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백자음각 한기 묘지, 조선 1559년,

한기(韓紀)는 성종의 딸 정혜옹주와 결혼하여 청평위가 된 사람이다. 백자의 유조는 난백색을 띤 조선초기의 특징이 나타나며 글씨는 한자 한자 정성드려 썼다. 뒷면에는 순서를 따라 ‘第一’에서 ‘第七’까지의 글가자 음각되어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주형 진주강씨 묘지, 조선후기

백자청화 김효대 묘지합, 조선 1781년 이후

백자철화 제기형 묘지, 조선후기

백자청화 숙의정씨 묘지, 조선 1581년, 백자청화 박제정 묘지, 조선 1885년

백자청화 궁인 묘지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