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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문양이 된 문자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후기 백자에는 일반인들이 선호했던 십장생같은 길상의 의미를 갖는 다양한 문양들과 함께 문자들도 장식에 사용되었다. 특히 ‘壽’와 ‘福’이 장식된 청화백자가 관요와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져서 궁궐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경향은 명청대에 고증학풍의 영향으로 비석이나 제기 등에 새겨진 글자에 대한 연구와 골동품을 수집하는 상류계층의 취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글자가 새겨진 그릇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

이 디자인패널은 본 전시실에 진열되어 있는 청화백자에 시문되 다양한 서체의 수복자를 조합하여 백수백복도 병풍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백수백복도 병풍은 장수와 다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壽’, ‘福’ 두 글자를 완전한 수를 의미하는 백자만큼 그려 넣어 8폭 내지 10폭으로 만든 것으로 주로 조선후기 궁중이나 세도가의 잔치에 사용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복자문 화형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복자문 접시
수복자문을 시문할 때는 내저면의 가운데 글자를 써 넣거나 단선 내지 이중의 원권을 두르고 시문하는 방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중에서도 원권 안에 글씨를 쓰는 유형은 조선전기에 중국 명대 민요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왕실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조선말기까지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제작되었다. 서체는 초서나 예서 등이 사용되다가 점차 도안화 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수복자문 화형 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복자문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복자문 유개발.완.접시.종자,
발이나 완, 접시 등 각종 기명의 외면에 수복자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단을 이루도록 배열 장식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명대에 범어를 이와 같이 시문했던 예가 있고, 청대에는 이러한 구성의 ‘喜’자문이 칠기 장식문양으로 유행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다른 글자보다 특히 수복자를 애호한 점이 특징이며 조선후기에는 청화백자 뿐 아니라 양각백자로도 제작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수자문 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문수무강자문 발
수복자문 외에 ‘萬壽無疆’ 네 자도 길상문자로 시문되었다. 이 발의 외면에는 나뭇가지 형태로 문양화한 글자를 사방에 배치하였다. 각각의 글라로부터 불수감과 매화, 모란, 배꽃이 자라나 생동감을 준다. 이러한 꽃나무와 길상문자의 조합은 조선후기 문자도(文字圖)에서도 발견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양각 수복자문 주자, 백자양각 수복자문 뚜껑, 조선 19세기

백자양각 매죽문 사각 병,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복자문 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복자문 유개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편복문 합, 조선 19세기말~20세기초

백자청화 수복자문 발, 조선 19세기

백차청화 수복자문 유개발, 백자청화 수자문 육각 병,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자문 사각 연적.통형 병

문자문은 전서체를 변형시켜 원형 혹은 장방형으로 도안화되어 그려지기도 하였다. 그 중 원형도안 수자문은 중국 청대자기류와 금속기에도 많이 사용되었던 문양으로 조선말기에는 특히 단독으로도 자주 시문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수자문 화형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자문 화형 접시,
틀을 이용해 형태를 만들고 원형도안수자문으로 장식한 국화형 접시는 기형상 칠기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명말에서 청대에 걸쳐 유행하였다. 일본과 조선에도 전해졌는데 조선의 것은 형태와 질의 면에서 일본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여 영향관계를 가늠할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다른 문양과 조화를 이룬 수복문자

백자청화 초화문 호, 조선 18세기

백자청화 초충.초화문 접시
문자와 초화문이 복합 시문된 접시이다. 그릇의 중심에 장방형으로 도안호된 수복자를 원권 안에 그리고 그 주위로 국화나 난초, 패랭이와 같은 초화를 괴석이나 풀벌레와 함께 그려 화려함을 더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백자청화 초충.초화문 접시, 조선 19세기말 ~20세기초

백자청화 초화수복자문 사각 주자,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만자문 이층 찬합, 조선 20세기 전반, 백자청화양각 화문 양이 향로, 조선 19세기말~20세기초, 백자청화투각 만자문 잔대,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만수무강자문 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복국화문 합, 조선 19세기 말~20세기 초, 백자청화 문자문 합, 조선 19세기말 ~20세기초


백자청화 칠보수복강녕문 합, 조선 19세기

문양이 된 문자: 수복자문(壽福字文)의 유행
길상의 의미를 가진 글자들은 문양으로서 백자의 장식에 사용되었다. 특히 수복자가 시문된 청화백자는 관요와 지방요에서 모두 생산되어 궁궐과 관청 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널리 애용되었다. 이것은 각종 공예품에 길상문자를 장식하던 중국 명청대의 풍조가 유입되어 처음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것이 분원의 민영화 등으로 민간에까지 확산되고 성행했기 때문이다. 수복자문이 시문된 기종은 반상기명(飯床器銘), 즉 식기류에 많이 나타나 복을 누리며 장수하기를 염원한 기복적 성격을 보여준다. 수복자를 써 넣을 때는 다양한 서체를 사용하였는데 초서와 해서로 쓰인 것이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이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방식은 원권을 두르고 그 안에 글자를 쓴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명대 민요에서 전해져 조선전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원권이 없는 글자는 여러 단을 이루며 청화로 반쪽 시문되거나 백니필화암각(白泥筆畵陽刻)기법으로 제작된 고급기종의 문양이 되었다. 조선말기에 이르면 전서체를 변형시켜 만든 원형 혹은 장방형의 도안 수복자문이 많이 나타나 박쥐문이나 초화문 등과 함께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